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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만으로 살 수 없는 최고급 시계 ‘파텍 필립’…이브 카바디니 부사장 밝힌 ‘희소성의 원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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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1999년 소더비 경매에서 시계 경매 사상 가장 비싼 시계가 등장했다. 1933년에 제작된 이 시계는 24개의 컴플리케이션이 탑재된 18K시계로 당시 낙찰가는 1100만 달러(약 123억원)였다. 제조사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시계 브랜드’로 불리는 파텍 필립이다. 폴란드 망명 귀족 앙투안 드 파텍과 프랑스 출신 시계 기술자 장 아드리앙 필립이 스위스 제네바를 기반으로 1839년에 시작한 파텍 필립은 돈이 있어도 쉽게 살 수 없는 희소가치 때문에 ‘시계 분야의 롤스로이스’로 통한다. 만약 제품을 구매하려면 인적사항, 과거 구매내역, 주변의 평판도 등을 적은 서류를 제출한 후 제네바 본사의 심사를 기다려야 한다. 최근 방한한 파텍 필립 부사장 이브 카바디니(51)는 이렇게 까다로운 구매 과정에 대해 “평범한 시계는 실용품에 불과하지만 파텍 필립의 시계는 사는 순간 예술품의 가치를 갖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9일 서울 갤러리아백화점에 파텍 필립 단독 매장이 문을 열었다. 현대 시계사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70여 종의 시계가 매장 진열장에서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데 가격대를 살펴보니 가장 저렴한 게 2000만원대다. 매장 내 존재하는 시계 중 최고가는 4억8000만원대라고 한다. 카바디니 부사장은 “함부로 매장에 진열할 수 없는 하이엔드급 시계들은 아예 가격이 매겨져 있지 않다”고 했다.

‘파텍 필립’의 창립자인 장 아드리앙 필립(왼쪽)과 앙투안 드 파텍.

●왜 이렇게 비싼 건가.

 “최상의 기술력과 희소성이 만들어낸 가치라고 생각해 달라. 우리는 연간 4만5000개의 시계를 한정 생산한다. 이 중 3만5000개가 기계식 시계다. 그런데 이 시계들을 위해선 50종류의 혁신적인 무브먼트와 1500만 개 이상의 부품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철저히 우리 힘으로 수작업을 통해서만 생산하고 있다. 말 그대로 173년의 역사가 응축된 ‘시간의 힘’이 이 작은 원 안에 담겨 있다.”

●‘철저히 우리 힘으로 시계를 제작한다’는 의미는.

 “시계 공업의 중심지인 제네바에는 유명 시계 브랜드가 여럿 있지만 우리처럼 생산·디자인·유통 등 전 과정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회사는 거의 없다. 시계 부속을 만드는 기술자들은 물론 시곗줄 재단사, 보석 세공사, 금속 각인사까지 파텍 필립 시계들은 오랫동안 함께해 온 우리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자체 제작과 직접 통제의 효율성은.

 “그만큼 품질 관리가 철저히 이뤄질 수 있다. 시계 하나가 완성되기까지 최소 500일에서 1000일의 제작 기간이 필요하다. 이때 무수히 많은 품질 관리 과정을 거치는데 우리는 완제품이 매장에 나가기 전 우리만의 인증 시스템인 ‘파텍 필립 실’을 통해 최소 30일간의 체크 기간을 다시 갖는다.”

 현재 전 세계 시계산업이 이용하고 있는 품질인증 마크는 ‘제네바 실’(Geneve Seal)이다. 12개의 항목에 따라 시계의 정밀성과 내구성 등을 검증하는 제네바 실은 스위스 명품 시계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스러운 마크’다. 그런데 2009년 파텍 필립은 제네바 실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자체적으로 마련한 ‘파텍 필립 실’을 통해 모든 품질을 관리하고 있다.

‘스카이문 투르비용’의 앞면(아래)과 뒷면

●지나치게 확고한 자부심은 자만으로 비칠 수도 있다.

 “파텍 필립 실이 제네바 실을 넘어선 기준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 제네바 실은 시계 무브먼트의 ‘정확성’과 관련된 인증 시스템이다. 파텍 필립 실은 무브먼트뿐 아니라 밴드·버클을 비롯해 시계에 필요한 모든 부품을 대상으로 한다. 심지어 금속의 반짝임 정도까지 체크한다.”

●업계에서 논란이 될 만큼 위험한 ‘독단’을 관철시킨 이유는.

 “작은 부속 하나까지도 예술품으로 승화시키고 싶은 기업의 이념 때문이다. ‘파텍 필립의 동력이자 운영 원칙 10가지’라는 게 있는데 그중 핵심이 ‘전통 및 혁신’ 항목이다. 새로운 기술 혁신과 전통적인 예술미를 동시에 추구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주네브 에나멜(한국의 칠보 기술에 해당하는 작업)’ 과정에선 장인들이 100년 넘게 사용해온 공구를 이용해 옛날 방식대로 작업한다. 시계에 화려한 색감을 입히는 이 과정을 예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술적 미학을 추구하는 시계치곤 좀 심심해 보인다.

 “10년, 30년, 100년 전 시계를 차도 어색하지 않은 디자인, 자손들에게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시계를 위해 ‘클래식’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 광고에는 언제나 ‘당신은 파텍 필립을 소유한 것이 아닙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잠시 맡아두고 있을 뿐입니다’라는 문구가 들어간다. 광고의 전면을 채우는 사진도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다. 시계 사진은 구석에 작게 들어가 있다. 부자(父子), 모녀(母女) 사이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세대 공감,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진정한 가치다. 100년 전 부품들까지 보관하는 것도 다음 세대를 위한 A/S를 완벽히 준비하기 위해서다.”

●중요한 기술, 가령 투르비용 같은 장치는 시각적 노출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브랜드가 투르비용이 잘 보이도록 다이얼에 구멍을 내는 디자인을 한다. 하지만 우린 겉에서는 볼 수 없게 다이얼 속에 장착한다. 투르비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오일이 자외선에 약하기 때문이다. 투르비용의 디자인적 요소보다 기능에 충실하자는 원칙이다.”

●파텍 필립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구매 과정이 까다로운 만큼 구매자에 대한 보호 또한 철저하다. 이 때문에 최근 구매자들에 대해선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다. 과거의 인물을 꼽자면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왕자가 파텍 필립을 소유한 최초의 귀족이다. 이후 러시아 니콜라스 2세를 비롯해 차이콥스키, 리하르트 바그너, 록펠러, 아인슈타인 등이 파텍 필립 고객 명단에 올랐다.”

 이브 카바디니 부사장은 세계에서 가장 큰 향수 제조 회사인 지보단에서 아프리카와 중동을 담당하는 영업 매니저로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리치몬트 그룹의 시계 브랜드 보메&메르시에와 구찌그룹 시계 사업부 등을 거쳤고 2006년 파텍 필립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스타 칼리버 2000’ 의 앞면(아래)과 뒷면

●20년 동안 시계 시장을 경험했다. 한국 시장에 대한 평가는.

 “10년 넘게 한국 시장을 지켜봤는데 최근 3~4년 사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특히 남자들의 기계식 시계에 대한 인지도와 교육 수준이 꽤 높아졌다. 지금까지 서울 강북에 매장 하나만 신중하게 유지하다 이번에 새롭게 강남 매장을 낸 것도 시장 가능성을 판단했기 때문이다.”

●남성 시계 시장이 성장한 이유를 뭐라고 보나.

 “시계에 대한 생각이 ‘단순한 실용품’에서 ‘나를 만족시키는 액세서리’로 변화한 게 주요 원인 같다. 시간·장소·상황에 따라 시계를 바꿔 차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여러 개의 시계를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스스로의 만족도까지 고려하는 수준이 되면 고가의 명품 시계들에 관심을 갖게 된다.”

●개인적으로 소유한 시계의 개수는.

 “시계 산업에 종사한 지 20여 년이다. 개인적으로도 시계를 좋아해서 현재 소장하고 있는 시계는 20~25개 정도다. 다 파텍 필립이라면 좋겠지만 그건 누구라도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마음을 비웠다.(웃음)”

●매일 아침 출근할 때 ‘오늘의 시계’를 고르는 기준은.

 “기분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일정한 규칙은 없다. 출장을 갈 때는 가볍고 견고한 스포츠 시계를 갖고 간다는 정도다. 시계 업계 사람으로 한 가지 조언한다면 시계 디자인은 간결할수록 어떤 옷에나 잘 어울린다.”

●출장이 많은가.

 “불행하게도(웃음) 그렇다. 1년에 50개국 이상을 방문해야 한다.”

●출장 노하우가 있다면.

 “워커홀릭 대부분이 출장지에 대한 기억을 ‘공항과 호텔이 전부’라고 말한다. 일만 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랬기 때문에 후회가 많다. 젊은 경영인들에게 아주 잠깐이라도 출장지의 문화를 경험할 기회를 가져보라고 조언하고 싶다. 미래의 마케팅은 감성과 문화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것이다. 이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 직접 경험한 문화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신의 경영 철학은.

 “늘 강조하는 것은 공정성이다. 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 어떤 일에서든 공정할 수 있다는 건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의미다. 인격적으로도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What Matters 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

“당연히 가족이다. 직업상 출장이 잦다. 지난 두 달 동안 집에 있었던 날은 불과 10일뿐이었다. 이 때문에 가족에게 사랑받는 나만의 비법 세 가지로 틈틈이 노력하고 있다. 첫째, 출장지에서 기념품을 사가는 것은 기본이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좋다. 동일한 출장지가 반복되면 종류를 달리한다. 둘째, ‘아내가 쉬는 날’을 많이 만들려고 한다. 집에 있을 땐 주로 내가 요리를 하는 것도 그 이유다. 아들·딸과 함께 요리를 만들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내게 매우 소중하다. 셋째, 가족여행을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여행은 모두에게 흥분과 감동을 주는 좋은 방법이다. 아이들에게 색다른 문화를 설명하면서 대화의 폭도 넓힐 수 있어 더욱 좋다.”

파텍 필립의 걸작들
새 천년 기념한 ‘스타 칼리버 2000’
한 세트 90억원 … 일출·일몰 시간까지

시계에서 ‘컴플리케이션’이란 시간(시·분·초)과 날짜(요일·날짜) 외에 더해진 복잡한 기능을 말한다. 기계식 시계들의 고기능성을 말할 때 언급되는 투르비용, 문 페이즈, 퍼페추얼 캘린더 등이 여기 해당된다. 대부분의 시계는 500원짜리 동전만 한 너비와 1~2㎝ 미만의 두께다. 이 얇고 작은 원통 안에 복잡한 기능을 얼마나 많이 담는가에 따라 시계 회사의 기술력이 증명된다.

 파텍 필립은 1989년에 창립 150주년을 기념해 33개의 컴플리케이션이 탑재된 ‘칼리버89’를 선보였다. 개발 기간만 9년이 걸린 이 시계는 총 1782개의 부품으로 구성돼 있으며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회중시계’로 알려져 있다.

 2000년에 새로운 밀레니엄을 기념하며 제작한 ‘스타 칼리버 2000’은 일몰과 일출, 웨스트민스터 카리용(웨스터민스터 사원의 종소리를 내는 미니트 리피터), 퍼페추얼 캘린더, 문 페이즈 등 21가지의 컴플리케이션 기능이 장착된 시계다. 1118가지 부품으로 이뤄져 있으며 시계 뒷면에는 스카이 차트까지 탑재했다. 4개가 한 세트이며 총 5개 세트가 제작됐다. 발표 당시 전문가들이 평가한 한 세트 가격은 90억원대였다.

 2001년에 선보인 양면 다이얼 손목시계 ‘스카이문 투르비용(시계 목록 번호 5002)’은 12개의 컴플리케이션을 686개의 부품으로 구현해 낸 작품이다. 가격은 13억원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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