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명문장이란 어떤 모습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난 주 한 사적인 자리에서 유명한 문학저널리스트 김훈(52)의 신간 에세이 〈자전거 여행〉(생각의 나무)이 화제에 올랐더랬습니다.

〈자전거 여행〉을 완성도 높은 문장으로 볼수 있는가, 우리시대 명문장은 과연 어떤 것인가를 놓고 편안한 한담을 나눈 것이죠. 얘기의 실마리로 대화 일부를 소개합니다.

참석자는 사진작가 강운구선생, 도서출판 까치 박종만사장 그리고 기자까지 3명. 이중 강선생이야 신간에 사진 몇 컷을 제공한 인연이 있고 글솜씨 도 평가받는 분이고, 박사장은 입맛 까타로운 독설가 아닙니까.

김훈 옹호론은 강선생이 펼쳤습니다.

말 중간에 기자가 "원칙주의자께서 왠일로? 하고 제동까지 걸었지만, 그의 논지는 명료했습니다.

공리적인 글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김훈의 독자적인 스타일은 문학적 호흡에 충실하다는 것이죠. 이에 반해 박사장은 중립적 반응을 보였습니다.

너무 많은 수사(修辭)로 설득력이 반감됐다는 문제제기도 했지만, '문학저널리스트 김훈' 의 평균적 내공만은 일단 인정하자는 쪽이었죠.

박사장의 독설은 그 다음입니다.

"교과서에 실려 명문으로 평가받고 있는 피천득 선생의 글도 실은 여성취향의 감상주의라서 알고보면 신통치 않고, 다른 이들도 엇비슷하다.

한국에 문장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나? 그 자리에서 기자가 말을 아꼈던 것은 연배가 밑이기도 하고, 〈자전거 여행〉에 비판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전거 여행〉은 자전거로 전국의 산천을 주유하면서 얻은 역사와 인간의 삶에 관한 성찰을 담은 책. 저는 이 에세이를 '포즈만 무성한 드라이아이스 과(科)문장' 이라고 봅니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않았다. 그것들은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어떻습니까. 해독이 되십니까? 한참 뜯어보니 문학과 문장에 대한 열정으로 읽혀지나, 울림이 없고 쉬 공감이 안됩니다.

미문(美文)에 대한 과도한 경사가 유감스런 결과를 낳은 것이죠. 이런 미문의 뿌리는 일제시대 이태준의 〈문장강화〉로 올라갑니다.

조동일 교수도 〈독서 학문 문화〉(서울대 출판부)에서 감각에 흐르는 일본문장의 나쁜 영향을 지적한 바 있지요. 결정적으로 이태준이 전통의 한문 문장을 도외시해 시야가 차단돼 있었다는 사실도 언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자가 보기에 1970년대 이후 문학 장르에서 우심해진 미문주의는 자칭 해방후 첫 한글세대라고 했던 문학평론가 김현에게서 다시 발견됩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김현 아류들이 60년대산(産) 문학평론가들에 의해 쏟아져 나오면서 문학의 대중적 저변이 좁아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모두 압니다.

문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기자는 문제의 미문주의란 스타일 상의 문제가 아니라 근현대 문학의 성격규명에도 적절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근대적 의미의 내면(에고)에 대한 과도한 기울어진 희뿌윰한 드라이아이스 문장, 그리고 턱없는 감상주의 글들. 릴케의 초기작인 〈말테의 수기〉에도 전형적으로 노출되기도 하는 이런 글들을 우리는 그동안 미문으로 알아왔던 것이죠. 사람들이 보통 나이 들면 문학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이런 감상주의에 대한 싫증으로 판단됩니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리타니 고진이 미문을 멀리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죠. 따락서 기자가 보기에 좋은 문장은 외려 문학의 밖에서도 찾아볼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함석헌 선생의 일련의 저술, 연세대 명예교수인 사학자 민영규선생의 〈예루살렘 입성기〉, 그리고 신학자 안병무 선생, 〈시간의 여울〉에서 보이는 재일화가 이우환의 글들은 현대 문장을 말할 때 빼놓을 수없는 텍스트들입니다.

좁은 의미의 문학주의에서 자유로운 힘있고 건강한 글들이 이들입니다.

아쉬운 점은 이런 글들이 각자의 전공에 가려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점이지요. 그러면 우리의 전통속의 좋은 문장은 어떤 걸까요? 조동일 교수에 따르면 조선조 사회는 유난히 제술(製述, 글쓰기)를 장려했고, 따라서 한국사회는 문집이 많다는 사실, 그리고 이규보, 김시습, 박지원의 글들이야말로 명문의 전형이라고 밝혀 앞으로 규명이 기대됩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 기자의 얘기는 결론은 없고, 문제제기만 많습니다.

단우리 문장이 전통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렸다는 점, 그리고 현대 문학은 '나홀로 문학주의' 에 빠져왔다는 점에 대한 발견이 중요합니다.

그러고 보니 문장이란 것도 파행의 근현대사를 정확하게 상징하는 셈입니다.

전통은 잃어버렸고, 그렇다고 당대의 모더니티는 획득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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