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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의 ‘위대한 식재료’] 제주도 유기농 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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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제주도 출신 후배가 집에서 가져온 귤을 먹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귤은 이렇게 먹어야 제맛이에요” 하더니, 껍질도 까지 않고 통째로 입에 쏙 밀어 넣었다. 같은 자리에 있던 대여섯 명이 모두 “더럽잖아!” 하면서 얼굴을 찌푸렸지만, 정작 그는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 귤이 무농약 귤이나 유기농 귤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껍질에 왁스 코팅이 된 귤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귤은 껍질에 왁스로 코팅이 되어 있다. 귤껍질이 반들반들한 이유가 그것이다. 후배가 집에서 가져온 귤은 코팅하기 전의 것이고, 그러니 먼지만 쓱쓱 닦아내고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흔히 귤껍질을 당연히 버리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귤껍질을 요리에 이용하는 방식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오렌지를 반으로 잘라 압착 방식으로 주스를 만들 때에도 껍질의 즙이 상당히 들어간다. 알맹이만으로 만들었을 때보다 강한 향과 쌉쌀한 맛이 더해져 맛이 화려해진다. 그뿐인가. 자잘한 금귤, 유자차는 물론 홍차에 넣어 먹는 레몬도 모두 껍질째 먹는 방식인데, 이 껍질이 몸에 좋은 것이란다. 그래도 나처럼 음식에 까다로운 사람은 이런 것들을 흔쾌한 마음으로 먹지 못한다. 공중 살포한 농약이 스며들어 있을 껍질을, 아무리 잔류농약검사 등을 했다 하더라도 저렇게 계속 먹어도 되는 걸까 싶은 생각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농약 때문에 껍질 먹는 습관을 많이 잃어버렸다 싶다. 어릴 적부터 해왔던, 사과를 껍질째 먹는 습관, 포도 껍질에 붙어 있는 맛있는 과즙을 쪽쪽 빨아먹는 습관, 삶은 밤고구마를 껍질째 먹는 습관 같은 것은, 농약의 보편화와 함께 사라졌다. 그러다 최근 껍질 성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친환경 생산이 늘어나면서 다시 예전 방식을 조금 회복하고 있다. 사실 내가 요즘 유기농 귤을 찾아 먹기 시작한 것은, 알맹이보다 껍질에 대한 욕심이 더 크게 작용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 표선면 가시리의 유기농 귤 농장에는 청정지역에서만 산다는 반딧불이가 진짜로 날아다닌다. 그래서 브랜드 이름이 ‘반딧불이 감귤’이다. 유기농 재배는 반딧불이에게만 살기 좋은 게 아니라 다른 벌레들도 살기 좋게 만들어 준다. 여름내 벌레들과의 험한 싸움을 견뎌내느라 껍질이 흠집투성이가 된 못난이 귤이 발갛게 잘 익었다.

 지난해부터 나에게 유기농 귤을 보내주고 있는 지인이 귀농한 곳은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다. 그 마을에서 유기농 귤을 생산하는 농가는 달랑 네 집뿐, 그나마 한 집은 내 지인인 귀농 3년차 자칭 ‘얼치기 농사꾼’이다.

 귤나무에는 주황색 귤이 탐스럽게 달려 있었다. 귤나무를 가까이에서 보기 힘들었던 ‘육지 촌놈’들은 그 모습에 그저 ‘와!’ 하고 환호부터 했지만, 나중에 관행농(농약과 화학비료를 써서 키우는 일반적인 농업을 일컫는 말이다) 귤나무들과 비교해 보니 유기농 귤나무에 달린 귤 수량은 관행농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었다. 풀이 자라는 귤나무 밑은 제초제를 쓰지 않고 손으로 잡초를 뽑은 티가 역력했다.

수확해 쌓아놓는 못난이 귤들을 보고 있노라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신경림의 시 구절이 생각나 빙긋 웃음이 나온다.

 유기농 귤은 그냥 육안으로도 쉽게 구별된다. 첫째, 색깔이 훨씬 붉다. 일반 귤이 노란빛이 강하다면, 유기농 귤은 붉은빛이 강한 진짜 주황색이다. 둘째, 껍질에 거무티티한 회색빛 흠집이 많다. 여름 동안 벌레들이 입질을 하고 지나간 흔적들이다. 그러니 껍질 생김새로는 그다지 식욕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래도 눈으로 먹는 게 아니고 입으로 먹는 것이니, 일단 까봐야 하지 않겠는가. 유기농 귤의 셋째 특성은, 잘 안 까진다는 것이다. 껍질과 과육이 들떠 홀랑 벗겨지는 귤에 익숙한 사람들은, 유기농 귤이 안 까진다고 불평이 이만저만 아니다. 하지만 귤은 이 상태가 정상이란다. 시중에서 파는 귤이 말랑한 것은 유통 중에 시들어서인데, 껍질에 코팅을 해놓은 일반 귤은 껍질이 잘 마르지 않아 껍질 들뜨는 현상이 훨씬 더 심해진다. 이런 귤은 별로 신맛이 없고 향도 약하며, 그저 단맛만 남아 있다.

 유기농 귤의 넷째 특징은 신맛과 단맛이 모두 강하고 귤 특유의 향도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농장에서 방금 따온 귤을 까 먹어보면 일단 기막힌 향이 정말 매력적이다. 택배로 받아 처음 유기농 귤을 먹어보았을 때도 그 싱싱한 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나무에서 갓 따온 것은 향이 훨씬 강했다. 일반 귤은 화학비료 주고 수확량을 늘려 놓은 거라 맛과 향이 싱거워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껍질에 코팅을 한 후 그 왁스를 말리느라 약간의 열처리를 하면서 맛과 향이 더 떨어진다.

귀농 3년차 농부 지금종(47)씨가 ‘환상의 당도’를 보여주려 당도계를 들이댔다. 이 귤의 당도는 15.5브릭스였다.

 ‘얼치기 농사꾼’이 당도를 측정해 보여줬다. 방금 먹은 귤의 당도가 15.5브릭스다. 일반 귤의 평균 당도는 8~10브릭스며, 12브릭스만 돼도 매우 단 것으로 친다. 그런데 15.5라니! 심지어 며칠 전에 측정한 것 중에는 16.5브릭스도 있었단다.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뻥치지 마!’ 하며 안 믿어 준다며 웃는다. 올해는 가을이 가물고 볕이 워낙 좋아 귤이 작년보다 더 달기는 하지만, 이 정도 당도가 나오는 것은 유기농 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좋은 귤을 생산하는 농가는 그리 편치 못해 보였다. 가시리 친환경작목반의 중심 멤버인 ‘프로 농사꾼’ 김산현(53)씨 말로는, 유기농으로 키우면 생산량이 50~60%로 줄어드는데 가격은 1.5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단다. 문제는 또 있다. 유기농으로 키우다 자칫 잘못하면 나무가 약해져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는 ‘얼치기 농사꾼’에게 “지금 나무가 죽을 힘을 다해 이만큼 열매를 맺은 것이니, 내년에는 거름을 넉넉히 잘해 먹여야 한다”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했다.

 김산현씨의 농사 경력을 들으니 마음이 아팠다. 이전에 바나나 농사를 지었으나 수입 바나나가 값싸게 들어오면서 망했다고 했다. 그리고 귤 농사로 방향을 틀었는데, 싸구려 귤로 가다간 다시 망할 것 같아 유기농 귤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제 또 한·미FTA가 발효되면 이것도 어찌 될지, 김씨는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살길은 건강한 유기농 귤로 차별화하는 것뿐인데, 생존이 가능할지 걱정이란다. 다행히 올해는 경기도와 서울의 친환경 무상급식 덕분에 적정 크기의 유기농 귤은 모두 팔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유기농 귤은 알음알음으로 지인들에게 직거래 배송으로 많이 팔린다. 농부의 꼼꼼한 아내는 배송할 물건을 싸면서, 너무 작거나 껍질이 지나치게 못생긴 귤을 연신 골라내고 있었다. 맛에는 거의 차이가 없건만 ‘미모 탓’에 가끔 항의가 들어온다는 것이다. 소비자 마음이 이러니, 우리 동네 생협 매장에서도 유기농이 아닌 번드르르한 예쁜 귤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 ‘저농약’ 표시가 되어 있긴 하지만, 껍질까지 먹기는 찜찜한 귤이다. 하지만 유기농 귤이 하도 못생겨 안 팔리니 어쩔 수 없다는 게 생협 주인의 푸념이었다.

 하지만 이 못난이 귤이 얼마나 실속 있는지, 나는 겨울만 되면 행복하다. 나는 껍질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채를 썰어 설탕에 재어 귤청을 만든다. 껍질만으로는 신맛이 너무 안 나므로, 유자청 만들 듯 알맹이도 가끔 하나쯤 얄팍하게 썰어 함께 섞는다. 일주일 동안 매일 조금씩 껍질이 생기는 대로 채 썰고 또 설탕을 부어 놓았더니, 벌써 병이 다 찼다. 이 귤청을 물에 타서 먹으면 귤껍질을 말려 끓인 차보다 훨씬 맛있다. 또 잼처럼 빵과 함께 먹어도 아주 맛있다.

 상할 것이 염려되면, 설탕에 절인 그것을 냄비에 부어 끓인다. 눋지 않게 약한 불로 끓여 졸이는데, 그게 다름 아닌 마멀레이드다. 나는 이것을 플레인 요구르트에 섞어 먹는데, 작년에 많이 만들어둔 마멀레이드를 지금까지 먹고 있다. 요구르트의 시큼한 맛이 귤껍질의 열대과일스러운 향취와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이것 없으면 요구르트를 못 먹을 것 같아 아끼고 아끼면서 지금까지 먹고 있다. 하지만 이제 아낌없이 푹푹 넣어 먹어도 된다. 내일이면 올해의 새 귤로, 새 마멀레이드를 만들 테니까 말이다.

글=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영미 1961년 서울 신설동 한옥에서 태어난 서울 토박이. 개성 출신 할머니와 전북 출신 어머니의 손에서 나온 음식을 먹으며 ‘절대 미각’이 개발됐다.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대중문화평론가로, 음식에 대한 ‘평론’은 중간중간 취미 생활로 이어가고 있다. 『한국대중가요사』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 『세시봉, 서태지와 트로트를 부르다』 등이 그의 직업 관련 저서. 또 2006년 음식에세이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를 펴냈으며, 2010년 3월부터 1년 동안 중앙SUNDAY에 칼럼 ‘제철 밥상 차리기’를 연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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