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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lobal] 유엔아동기금 ‘유니세프’ 총재 앤서니 레이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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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한복판에 세워진 국내 기업 전광판, 우리 가요를 신나게 따라 부르는 외국인들…. 보고 있자면 코리안이라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할 것이 있다. 바로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에서 빛나고 있는 한국의 저력이다. 우리나라는 1950년대만 해도 유니세프로부터 국제 구호를 받는 첫 국가였다. 한데 94년부터 ‘주는 나라’가 됐다. 그것도 세계에서 유일한 케이스다. 기부금 액수도 톱10에 들 정도로 큰손 축에 든다. 여세를 몰아 지난달 말 부산에선 160개국 최고위 각료들이 모이는 ‘세계개발원조총회’까지 열었다. 행사를 찾은 앤서니 레이크(Anthony Lake·72) 유니세프 총재는 이런 한국을 두고 “경이롭다”는 말을 거듭했다. 한국 언론과의 첫 인터뷰라며 상기된 표정도 감추지 않았다.

글=이도은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장소협찬=파라다이스 호텔 부산

지난해 5월 취임한 레이크 총재는 국제 사회 및 미 행정부에서 고위 공직자로 오랫동안 일했다. 특히 45년간 세계 외교정책을 결정하고 이끌었다. 카터 대통령 행정부에선 국가안보·대외정책 부서장을 맡았고, 클린턴 대통령 시절엔 93년부터 4년간 국가안보위원을 지냈다. 또 2007년 미 대통령 선거 때엔 버락 오바마 후보의 대외정책 최고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런 공직 생활을 하면서도 40여 년간 국제봉사단·적십자사·세이브더칠드런의 국제고문·위원 등으로 꾸준히 NGO 활동에 몸담아 왔다.

●한국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지금껏 한국을 6~7번쯤 찾았다. 처음 한국에 온 건 70년대 말이었다. 당시 국무부 정책기획관으로 외교통상부와 회의를 하러 왔다. 당시 한국을 지금에 비할 순 없지만 어쨌든 내 눈엔 50년대 전쟁을 치른 나라라고 볼 수 없게 발전해 있었다. 이때부터 한국에 대한 애정과 경외심을 갖게 됐다.”

●외교 전문가다운 칭찬이다.

 “하하. 물론 외교상 좋은 말들을 하곤 한다. 하지만 한국에 대해선 인상 깊은 순간이 있어 더 그렇다. 하나는 당시 산업공단을 방문했을 때 한국 청년들이 나라 발전과 개발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현재 한국의 성장은 거기서 나온 듯하다. 또 하나는 김치 때문이다. 그때 김치를 처음 먹어본 이후로 나는 한국 친구로부터 김치를 얻어 먹곤 했다. 그런데 냉장고를 열 때마다 풍기는 김치 냄새를 내 비서가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점심 식사 때 먹었다.”

●현재 한국의 유니세프 기여도는.

 “94년 불과 360만 달러(약 42억원)에 그쳤던 기부금이 2010년 말 4600만 달러(약 535억원)에 이른다. 액수가 매년 20% 이상 늘어 올해는 6000만 달러(약 700억원)가 예상된다. 이 기회를 빌려 한국의 유니세프 후원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다른 나라들도 한국의 사례를 따를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한국에선 기부가 감정에 호소하는 측면이 큰 것 같다. 유니세프를 돕는 게 객관적·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나.

“한국은 세계 굴지의 무역대국이다. 유니세프의 도움을 받아 개도국의 아이들이 건강을 되찾고, 교육을 받고, 성차별 없이 생활한다면 훗날 한국에도 커다란 경제적 이득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미래 한국 상품에 대한 더 넓은 시장 구축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차가운 논리다.

 “맞다. 그런데 이 세상에 어린이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뭔가 도움을 주면서 자랑스럽고 뿌듯해지는 기분보다 더한 이득이 있나. 행복하기 위한 실질적인 투자로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다.”

2010년 5월 레이크 총재가 ‘유엔 여자어린이교육 캠페인(UNGEI)’ 세계 콘퍼런스가 열렸던 세네갈을 방문해 소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UNGEI는 개도국의 초·중등학교 과정에서 남녀 차별 없는 교육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사진작가 Getachew 촬영, 유니세프 제공]

●한국에선 외국보다 국내 어린이들부터 도와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선진국에서 종종 이러한 의견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그런가? 이런 의견이 대세였다면 어떻게 공여국이 됐겠나. 아직 50년대 유니세프의 지원을 기억하는 한국 친구들이 많이 남아 있다. 만약 이견이 있다 해도 그들이 잘 설득시켜 주고 있는 것 같다. 다시 한번 한국민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현재 레이크 총재가 맡은 최대 현안은 ‘아프리카의 뿔’을 돕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뿔’은 대륙의 가장 동쪽에 돌출돼 있는 지역을 일컫는 말로,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소말리아·지부티·수단·케냐 등을 아우르는 곳이다. 약 8000만 명의 인구가 사는 이 지역에는 올해 60년 만에 사상 최악의 가뭄이 생겨 1500만 인구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아프리카의 뿔’의 기근은 얼마나 심각한가.

 “현재 약 10만 명의 어린이가 목숨이 위태롭다. 도움이 없으면 며칠 내 혹은 몇 주 내에 기아로 인해 죽을 수도 있다.”

●구호품만 지원하는 것이 근본적이 해결책이 될까.

올 3월 에티오피아의 소수민족 마을인 비티 아코르(Beati Akor)를 찾아 유치원생들이 동화책 읽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레이크 총재. 아프리카 지역 아이들의 문맹률을 낮추는 것도 유니세프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사진작가 Getachew 촬영, 유니세프 제공]

 “그래서 우리도 동시에 미래를 내다보려 한다. 유니세프는 소말리아를 포함한 모든 지역에서 교육에 힘쓰고 있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니까. 이 점에서 나는 석 달 전 만났던 유목민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다. 케냐 북부에 터카나(Turkana) 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이었다. 가뭄 때문에 이웃이 죽어가고, 삶의 기반 전체가 무너져 있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도 교육 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이다. 먼 훗날 그들이 스스로 유목민으로 계속 살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삶을 살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

●교육으로 자립한 대표적인 사례가 있나.

 “(양쪽 어깨를 들썩이며) 바로 여기 한국 아닌가. 나는 아직도 60년대에 한국에 대한 원조가 필요하다고 강력히 역설했던 일이 생생한데, 지금의 발전한 한국의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만 봐도 그렇다. 그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노력과 교육을 통해 유엔 사무총장이 됐고, 수많은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반 총장은 유니세프에 각별한 관심이 있나.

 “꼭 그렇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유니세프를 항상 지지해주고 특히 산모와 신생아의 건강에 대해 특별한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다. 반 총장 자신의 어머니가 출산 시 목숨이 위태로웠던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문제는 향후 우리가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문제다.”

●김연아 선수도 유니세프의 국제 친선대사다.

 “너무나 아름답고 우아하고 뛰어난 선수다. 나는 영어로 유나킴이라고 부르지 않고 한국말 그대로 김연아라고 부른다. 올림픽 경기 때 김연아 선수가 피겨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따는 멋진 모습에 반했다. 그래서 하키 팬이었던 내가 이젠 피겨스케이팅의 팬이 됐다. 김 선수가 유니세프의 국제 친선대사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유니세프와 레이크 총재의 인연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98년부터 9년간 유니세프 미국위원회 이사로 있었고, 2004년부터 3년간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그 기간 동안 미국 위원회는 기금모금에서 큰 폭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유니세프와 특별한 추억이 있나.

 “어릴 때 핼러윈이 되면 작은 오렌지색 상자를 들고 다니면서 유니세프를 위한 기금모금을 했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사탕 아니면 유니세프를 위한 돈을 달라(Trick or Treat)’고 외치고 다녔다. 솔직히 그땐 유니세프를 위한 돈보다는 사탕 주기를 더 바라긴 했다(웃음). 훗날 유니세프 친선대사였던 대니 케이(할리우드 희극배우 겸 가수)와 오드리 헵번 덕분에 유니세프를 더 잘 알게 됐다. 특히 오드리 헵번과는 오랫동안 친분이 있었다. 이후 미국 유니세프 총장까지 하게 됐으니 대단한 인연이다.”

●구호 현장에 많이 가나.

 “당연히 세계 곳곳을 다닌다. 굶주린 아이들이 누더기가 된 축구공을 들고 깔깔 웃어댈 때 나는 많은 것을 배운다. 아이들을 보면서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뭐든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을 그저 도움이 필요한 약한 이들로만 생각하곤 한다. 어떤 사람 중에는 그들이 게으르고 무력하고 의지가 약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내가 현장에서 만난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용감하고 강인한 사람들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삶의 투쟁을 하는 것이다. 이들이 전쟁과 기근 지역에서 살게 된 것은 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을 위한, 어린 자식들을 위해 의지를 불태운다. 그들은 우리의 동정심만이 아닌 지지를 받아야 한다.”

What Matters Most?

●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심각한 것부터 말하겠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우주 만물을 우리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세상에 기여하려 하고, 소중한 가족들을 항상 잊지 않는다. 그러니까 살아가면서 나 자신, 일에 대한 열정과 가족·타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자, 이제 가벼운 답을 해볼까. 봄과 여름이 지나 가을이 왔을 때 무엇보다도 나에게 중요한 것은 야구팀인 보스턴 레드삭스가 경기에서 이기는 것이다.”

j 칵테일 >> “북한 어린이도 한반도 미래 이끌 소중한 세대”

레이크 총재의 ‘한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북한에까지 미쳤다. 그는 유니세프가 현재 북한 어린이를 돕기 위한 영양 공급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5년간 이를 실시한 뒤엔 북한 정부가 이를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는 “북한 어린이들도 한반도의 미래를 이끌어갈 소중한 세대”라고 강조했다.

●북한 어린이들의 상황은 얼마나 심각한가.

 “정말 매우 심각하다. 아프리카만큼 최악의 상태나 다름없다.”

●뭐가 가장 문제인가.

 “북한 어린이들은 현재 지구상에 1억8000만 명의 어린이가 고통받고 있는 최악의 문제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영양 실조뿐 아니라 발육 부진이 심각하다. 발육 부진은 임신 기간을 포함해 아이의 생애 첫 1000일간에 발생하게 된다. 그저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키가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하고 인지발달에 장애가 오게 된다. 한번 발육 부진이 생기면 되돌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평생 동안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다시 말하면 충분한 학습 능력도 없고 경제활동도 정상적으로 하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은 사회 구성원으로 제대로 역할을 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아이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발육 부진 비율이 30%에 달한다. 다른 개발도상국에서는 25~50%다. 이렇게 많은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그 국가는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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