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전집 예상 깨고 선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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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웬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이 그리 불티나게 팔리냐며 외국 사람들 눈이 화등잔만해졌던 시절이 한때 있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얘긴데, 알고 보면 책과 담 쌓고 사는 우리 지식사회의 취약성이 여지없이 드러나 포복절도할 수밖에 없는 해프닝이었지요.

당시 브리태니카 판매 책임자는 나중 '뿌리깊은 나무' 대표를 지냈던 한창기씨. 그는 마케팅 전략으로 교수.의사 등 '먹물' 을 타깃으로 삼아 영업을 시작했답니다.

뚜껑을 여니 예상과 영판 달랐습니다. 하루 한 질 판매가 어려웠죠.

한참 고전하던 판에 '광맥' 은 전혀 엉뚱한 데서 터졌습니다. 초창기 개발 붐을 타 얼결에 돈을 만졌던 벼락부자들, 그들이 사전을 사겠다고 줄을 섰던 것이죠. 덜렁 마련한 자기 집의 빈 공간을 장식할 '근사한 그 무엇' 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 어름 미술시장이 막 형성됐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음미해볼 대목이죠.

묵은 얘기를 환기시킨 것은 출판계의 한 기분 좋은 '사건' 때문입니다.

뉴스의 진원지는 도서출판 열린책들. 이 출판사는 소설가 이문열의 표현대로 '무모하다 못해 미련하게 보이는' 대형 기획물인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전25권, 27만원)을 펴냈습니다. 그게 6월 초입니다.

책에 들인 정성과 번역의 완성도는 출판사적 평가를 받을 만했지만, 번역료를 포함해 제작비 5억원을 투입하는 만용을 부렸습니다.

전집 출간 직후 그 회사 대표 홍지웅(46)은 공언했습니다. "2천질을 팔지 못하면 출판업을 접고 말겠다." 듣기에 따라 비장한 그 말은 아마도 자부심의 표현일 겁니다.

3개월이 지난 지금, 홍지웅은 일단 출판업에서 손뗄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놀랍게도 이미 1천질이 팔렸다고 합니다.

출판시장의 영세함에 비춰 경이로운 결과죠. 더욱 놀랍게도 전집 구입자의 절반 가량이 전문직 종사자라고 합니다.

앞으로 3개월 내 2천질 판매 목표를 채울 수 있다고 출판사는 느긋하게 낙관하더라고요.

보실까요? 출판사가 구매자를 대상으로 한 자체 통계에 따르면 교수.작가.연구원들의 비율이 40%를 웃돌고 있습니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유명인으론 소설가 고원정. 양귀자 등이 있고, 문학평론가 김병익.우찬제.최원식 교수도 포함됐다고 합니다.

김혜경(푸른숲).조상호(나남출판) 등 출판사 대표들이 상당수 포함된 것도 이채롭지요. 언론인들도 꽤 많고, 특이하게 영화배우로는 심은하도 포함됐다고 들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아니, 겨우 1천질이라니?" 하고 되물으실랍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좋은 학술서도 1천부 팔기가 어려운 게 우리 현실이라서 기자는 그저 놀랍습니다.

장인적 공력이 들어간 책을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했다는 징후이고, 지식사회마저 합류하기 시작한 의미있는 신호탄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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