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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너머 저쪽 판타지 세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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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호 24면

영국 런던의 해러즈 백화점 크리스마스 쇼윈도. 크리스털을 이용해 겨울의 차가운 이미지를 살렸다./미국 맨해튼에 있는 백화점 버그도프 굿맨의 쇼윈도.‘동물의 카니발’을 주제로 환상적인 디스플레이를 선보였다

“윈도 디스플레이가 아닌 윈도 드레싱”
명품 매장이 즐비한 뉴욕 맨해튼 5번가. 최고급 백화점 ‘버그도프 굿맨’의 쇼윈도는 이곳에서도 최고로 꼽힌다. 놀라운 상상력이 만들어낸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디스플레이 덕에 쇼윈도는 갤러리를 연상케 한다. 올해 크리스마스 시즌의 테마는 ‘동물의 카니발(Carnival of the Animals)’. 눈꽃 드레스를 입은 여왕이 북극곰과 파티를 열고, 새파란 수족관 속에선 모자이크 타일로 만들어진 물고기가 헤엄친다. 번쩍이는 황금 빛깔로 열대 밀림을 표현하기도 했다. 2주에 한 번씩 새로운 테마를 정해 바뀌는 버그도프 굿맨의 쇼윈도는 두 명의 비주얼 아티스트, 린다 파고와 데이비드 호이가 15년간 맡아왔다. 이들의 ‘작품’은 지난해 『Windows at Bergdorf Goodman』이라는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명품 브랜드의 책을 만드는 애술린에서 펴냈다. 이 책에서 데이비드 호이는 쇼윈도 디스플레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니멀리즘은 좋은 것이다. 맥시밀리즘도 그렇다. 우리는 미디움-이즘(medium-ism)만은 피한다.”

각국의 크리스마스 쇼윈도

이와 함께 삭스 피프스 애비뉴(Saks Fifth Avenue) 백화점은 고급스럽지만 모던하고 간결한 디자인으로, 바니스 뉴욕(Barney’s New York)은 참신하고 젊은 감각을 내세운 쇼윈도를 선보이고 있다. 원래 패션업계엔 비주얼 머천다이저(VMD·Visual merchandiser)가 있다. 매장 인테리어 등 공간 전체를 꾸미고 구성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세분화되면서 쇼윈도만 담당하는 ‘윈도 드레서(window dresser)’가 생겨났다. 조르조 아르마니가 디자이너가 되기 전, 밀라노 고급 백화점의 윈도 드레서로 패션계에 첫 발을 들였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다.

윈도 드레서의 ‘윈도 드레싱(window dressing)’ 작업은 윈도 디스플레이와 같은 의미다. 그런데도 느낌이 사뭇 다르다. 디스플레이가 보여주기 위한 ‘전시’에 초점을 맞췄다면, 드레싱은 쇼윈도에 표정과 분위기를 불어넣는다. 사람이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말이다. 디스플레이가 마케팅 수단으로써 ‘욕망의 창’이라면 드레싱은 마케팅과 디자인·패션·아트의 총체다.아직 우리나라 백화점은 윈도 드레싱이라 할 만한 독자적인 쇼윈도를 선보이지 않는다. 조명으로 건물 외벽에 불을 밝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는 정도다. 쇼윈도 디스플레이는 백화점에 입점한 해외 명품 브랜드가 자체적으로 하도록 맡기는 게 대부분이다.

“윈도에 이야기를 담아라”
명품 브랜드들은 대체로 본사가 정한 테마와 디자인에 따라 쇼윈도 디스플레이를 하는데, 예쁘고 보기 좋게만 만드는 건 아니다. 각별한 메시지를 담거나 브랜드와 얽힌 오랜 이야기를 표현하기도 한다. 루이뷔통의 올해 크리스마스 테마는 서커스다. 쇼윈도 속에서 코끼리 인형이 재주를 부리고, 루이뷔통 가방을 들고 하이힐을 신은 여성 마네킹이 아슬아슬 줄을 탄다. 서커스의 환상이 연말의 들뜬 분위기와 제법 잘 어울리는 조합이기도 하지만 여기엔 창업자 가족과 엮인 스토리도 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서커스단이었던 ‘랜시 서커스단’과 루이뷔통 가족의 인연이다.

랜시 서커스단은 단원이 100명이 넘는 대규모 공연단이었다. 1858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할 때 나폴레옹 3세의 아내 유제니 황후 앞에서 쇼를 선보일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서커스단을 소유한 랜시 가족은 루이뷔통 가족의 이웃이었다. 루이뷔통 사람들은 사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고, 시끄러운 동물의 울음소리에 투덜댔다. 나중엔 랜시 서커스단이 조랑말을 운송할 수 있는 특별한 루이뷔통 트렁크를 만들어 줄 정도로 가깝게 지냈지만 말이다. 조랑말을 위한 이 트렁크는 훗날 ‘전설의 트렁크 100선’에 포함됐다. 이런 창업자 가족의 옛이야기가 서커스라는 쇼윈도 테마로 다시 살아나 전 세계 매장에서 선보이고 있다.
루이뷔통은 두어 달에 한 번, 윈도 디스플레이에 변화를 준다. 파리 본사에 있는 비주얼 머천다이징팀에서 주제를 정하고 디자인을 하면 각국 지사에서 이를 매장에 구현한다. 전 세계 루이뷔통 매장의 쇼윈도는 같은 날 똑같은 디자인으로 새 옷을 갈아입는 셈이다.

예외도 있다. 올해 12월 문을 연 시드니 매장의 쇼윈도엔 가방으로 만든 캥거루가 전시돼 있다. 매장 오픈이라는 이벤트를 맞아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특별한 경우다. 반면 에르메스는 각국 지사가 자체적으로 쇼윈도를 꾸민다. 에르메스는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제품을 통해 문화적 영향을 드러내는 데 적극적인 브랜드다. 97년을 ‘아프리카의 해’로, 2008년을 ‘인도의 해’로 정해 이국적 분위기가 물씬 나는 디자인을 선보인 것도 그런 맥락이다. 쇼윈도 디스플레이도 현지 작가와 함께 작업하거나 고유성을 최대한 인정하는 쪽이다.

에르메스코리아는 그림·설치·미디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전방위적인 활동을 펼쳐온 배영환 작가와 2008년부터 쇼윈도 작업을 해 오고 있다. 브랜드가 시즌에 따라 큰 주제를 정하면 배 작가가 구체적으로 기획을 하고 작품으로 만들어낸다. ‘브랜드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설치예술’이라는 현대적인 쇼윈도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방식이다. 올해 주제는 ‘꿈을 여는 장인의 열쇠’. 배 작가는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의 쇼윈도와 크리스마스트리 곳곳에 열쇠를 형상화해 설치했다.

지난해엔 일본의 유명한 실내 조형 디자이너 도쿠진 요시오카와 협업한 일본 에르메스의 쇼윈도가 화제가 됐다. 쇼윈도 안에 화면을 설치하고 비디오 속 여성이 입으로 훅하고 부는 바람에 따라 스카프가 휘날리도록 설계한 디자인이었다. 이처럼 현지의 젊은 작가가 쇼윈도 디스플레이를 하는 한국·일본과 달리 프랑스 파리 포부르생토노레 거리에 있는 에르메스 매장은 고전적인 쇼윈도를 선보이고 있다. 레일라 멘카리가 77년부터 매장의 쇼윈도 디스플레이를 줄곧 맡고 있다. 그는 올해 중국 등 아시아를 여행하면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중국식 꽃병, 금으로 만든 조각상 등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나는 크리스마스 쇼윈도를 선보였다.

까르띠에는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건물을 커다랗고 빨간 리본으로 묶는다. 패션 브랜드에 비해 쇼윈도에서 선보일 수 있는 아이템이 적은 점을 감안한 크리스마스 디스플레이다. 보석상자를 포장하는 이미지가 떠오르도록 건물 전체를 눈에 띄게 활용한 것이다. 또 매장 입구의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에 까르띠에의 붉은 보석상자를 줄줄이 매달아 소품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뉴욕의 5번가에도, 서울 청담동의 까르띠에 메종에도 같은 식으로 빨간 리본이 달려 있다.
맨해튼의 5번가만큼은 아니지만 명품 브랜드 플래그십 스토어가 모여 있는 청담사거리도 요즘 윈도 드레싱 중이다. 강남구청이 각 브랜드와 함께 쇼윈도와 거리가 어우러진 연말 풍경 만들기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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