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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의 좀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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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정용환
베이징 특파원

“총만 없었지 어부들이 온갖 흉기를 싣고 바다에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해.”

 “불법을 저지른 중국 민간인이 단속하던 외국 경찰관을 살해했다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정당방위랄까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중국 선장의 한국 해양경찰관 살해 사건을 취재하면서 신문방송학과를 갓 졸업한 JTBC의 한족 카메라맨과 나눈 얘기다. 남의 나라 바다에서 불법을 저지른 곤궁한 처지에서 오히려 공권력에 대들었다는 게 납득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공안의 눈초리가 매서운 중국에서 좀체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중국 어선들은 한국 영해에 들어오면 죽창과 쇠파이프·갈고리·낫으로 중무장한 약탈자로 돌변해왔다. 일상에 바쁜 평범한 중국인들에게 이들의 끔찍한 폭력범죄 행위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신문·방송·인터넷 포털사이트 등 선전 수단으로 동원되는 중국의 수많은 대중매체가 나라 밖 소식에 둔감한 건 아니다.

 얼마 전 대중지 환구시보(環球時報)의 인터넷판이 주최하는 토론회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당초 요청받은 발표 주제는 ‘건전한 인터넷 문화를 창달하자’는 캠페인성 내용이었는데 참석자들은 한국의 인터넷 실명제 현황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어왔다. 이날 초빙된 중국의 상위 40대 인터넷 매체의 편집 책임자들은 국내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욕설과 비방의 폐해와 연예인 자살 사건, 그리고 인터넷 실명제 도입 과정까지 미주알고주알 알고 있었다. 중국 당국이 홍콩과 대만의 친중(親中)적이지 않은 웹사이트는 열리지 않도록 방화벽을 쌓아놨지만 한국의 웹사이트는 거의 무제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한국 뉴스에 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선전당국의 보도지침을 준수하는 중국의 일간지나 인터넷 신문들은 이번 ‘서해바다 살해 사건’의 팩트나 이웃 나라 바다에서 좀비로 돌변해 흉포한 해적 행위를 일삼는 자국 어민들에 대해 눈을 감았다. 상대국 경찰관을 폭행·살해한 행위는 축소하고 자국 어민에 동정적인 여론은 키워 사태의 파장을 줄이려는 셈법이었을 것이다.

 중국 근해에는 물고기 씨가 말랐는데 코앞에는 황금어장이 펼쳐져 있는 구도다. 이들의 약탈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어민들의 민생과 직결되는 문제라 발본색원(拔本塞源)의 근절책을 내놓기도 어려운 관계당국의 고심은 짐작이 간다. 문제는 어민들의 폭력 행위가 수백억원씩 쏟아부어 공들이고 있는 중국의 국가홍보 전략에 차디찬 소금물을 끼얹는다는 점이다. 자국 공안 권력 앞에선 숨 죽이고 사는 중국인들이 나라 밖에선 상대국의 법질서를 짓밟고 낫과 갈고리로 공권력에 도전하는 모습이 국가 홍보영상보다 더 빠르게 지구촌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이는 단순한 사안이 아니다. 어부들의 폭력을 용인하는 중국 당국의 처신은 중국 위협론자들이 주장하는 폭력적 굴기의 한 단면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정용환 베이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