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의 다큐멘터리를 창조한 '조지 로메로'

중앙일보

입력

68년에 개봉된〈살아난 시체들의 밤〉에 대한 기사에서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이(끔찍한) 영화를 금지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것은 원래 의도와는 달리 이 잡지의 기사는 오히려 영화에는 호재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사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세트에 아마추어 배우들만이 출연한 초 저예산(약 15만 달러 정도) 영화에 관심을 가질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은 일견 매우 자연스런 일이었다. 컬러도 아니고, 결말마저도 너무도 절망적이라는 이유로 메이저 배급사들이 모두 고개를 내저었던 것도 수긍할만한 일이었다. 다소 과장해서 말한다면, 그 어떤 싸늘한 코멘트일지라도 홍보가 될 수 있을만한 사정이었던 것이다.

드라이브 인(drive-in) 극장이나 변두리 소극장으로 밀려난〈살아난 시체들의 밤〉은 그러나 점차 관객들의 주목을 끌어내게 되었고, 결국엔 일군의 광신도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살아난 시체들의 밤〉은 마치 좀비처럼 무덤 속에서 부활하게 된다.

〈살아난 시체들의 밤〉이 부활하는 순간은 이 영화가 컬트 영화의 이정표로 자리 매김하는 순간인 동시에 호러라는 장르 자체가 새로운 시선 아래 놓이는 순간이었다. 스크린 위에 '죽음의 시'를 쓴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 마리오 바바(Mario Bava)의 후계자 조지 로메로는 우선 잔혹성의 수위를 높여 놓았는데,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것은 그리 충격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면 그가 영화 속에, 영화 속 폭력과 선혈에다가 은밀하게 새겨놓은 비판의식은 여전히 돋보인다. 사실 이 영화가 '부활'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데에는, 영화가 보여주는 음울한 염세주의와 냉소주의가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의 집단 심리와 공명했던 탓도 크다고 볼 수 있다. 날카로운 주제의식이 소름 끼치는 시각적 공포에 품격을 안겨주는 영화, 그것이 당시 불과 스물 여덟의 젊은 영화 감독 조지 로메로가 감히 재정의(再定義)한 호러 장르였다.

주지하다시피,〈살아난 시체들의 밤〉은 무덤에서 일어나 인육을 탐하는 시체들이 마을을 공격한다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우선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산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리는 이 좀비들이 개별적인 존재로 봤을 때는 그리 공격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건 괴물이 대적하기 힘들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닐수록 그 이야기는 더 흥미진진해진다는 공포 스토리의 일반론을 깨뜨린 것이다. 허기를 채우려는 추동력 외에는 별다른 특별한 힘도 없어 보이는 '무력한' 좀비들이 위협적인 것은 단지 그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과 맞서 싸우는 인간들이 협력할 줄 모르고 너무 쉽게 광란 상태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로메로는 이런 식의 지극히 현실에 밀착된 스토리상의 조건들을 설정하고서는 그 스토리 안에 일상에 잠복한 공포, 소통의 부재, 가족의 붕괴 등과 같은 인간의 문제들을 묻어놓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영화들은 쾌락을 낳는 악몽의 판타지보다는 불쾌함을 유발하는 악몽의 다큐멘터리라고 부를만한 것들이다.

〈살아난 시체들의 밤〉부터 비롯된 로메로의 '시체 3부작' 모두가 현대 미국 사회에 대한 일종의 묵시록적인 알레고리이다. 이를테면, 60년대 후반에 나온〈살아난 시체들의 밤〉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미국의 황량한 정신과 조응한다면, 그로부터 10년 후에 나온 〈시체들의 새벽〉(국내 비디오 출시 제목은〈이블 헌터〉)은 현대 소비주의에 대한 논평처럼 보인다.〈시체들의 새벽〉에서 좀비와 인간의 싸움이 벌어지는 무대는 거대한 쇼핑 몰인데, 이곳을 유령처럼 배회하는 좀비들이나 도무지 쓸모 없는 물욕에 젖어있는 산 인간들이나 모두 현대인의 양면의 자화상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쇼핑몰이란 배경은 현대 사회를 비유하기에 적절한 공간인 것이다. 한편 지하 미사일 기지에서 벌어지는 80년대판 좀비 이야기 〈죽음의 날〉은 군비 경쟁에 골몰하던 레이건 정부를 향해 냉소를 던진다.

'시체 3부작'만을 대략 훑어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조지 로메로는 종종 반동적이라고 그리고 관객의 말초 신경에 호소한다고 여겨지던 장르 안에서 드물게 진보적인 시각과 예리한 지성을 보유한 작품들을 만들어왔다는 평을 듣는다.

실제로 그는 자기 영화들이 정치적 우화가 아니라고 누누이 강조했지만(예컨대, 로메로의 말에 따르면, 살아난 시체들의 밤〉에서 흑인이 주인공을 맡은 것은 순전히 그 흑인 배우가 다른 지망생들보다 연기가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시체 3부작'이 각각 60년대, 70년대, 그리고 80년대 사회를 재현한다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90년대 사회와 조응하는 좀비 영화도 만들고 싶어했다고 덧붙였다. 과연 90년대판 시체 시리즈가 만들어졌다면 어떤 식이었을까? 자신을 "십자군"(crusader)이 아니라 "관찰자"(observer)로 명명하는 로메로에 따르면, 이 성사되지 못한 프로젝트에서 좀비는 홈리스였을 것이라고 한다.

주요 작품

68년〈살아난 시체들의 밤 Night of the Living Dead〉 (비디오 출시)
77년〈마틴 Martin〉
78년〈시체들의 새벽 Dawn of the Dead〉(비디오 출시:〈이블 헌터〉)
81년〈나이트라이더스 Knightriders〉
82년〈크립쇼 Creepshow〉
85년〈죽음의 날 Day of the Dead〉(비디오 출시)
88년〈사투 Monkey Shines〉(비디오 출시)
90년〈검은 고양이 Two Evil Eyes〉(비디오 출시)
93년〈다크 하프 The Dark Half〉(비디오 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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