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 받아들이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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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호 31면

그룹 홈을 만들어 가출한 청소년들과 오랫동안 지내온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그곳에 오는 아이들은 일반인이 상상하지 못할 만큼 상처가 심하여 처음에는 함께 지내기가 무척 어렵다고 한다. 길거리 생활이 몸에 배어서 실내생활을 못 견디는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많은 아이들이 그곳에서 상처를 치유 받고 새 삶을 시작하는데, 아이들마다 변화가 오는 임계점이 다르다고 한다.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진심으로 보살펴 줘도 믿지 못하고 계속 비뚤어진 태도를 취하고 마음을 결코 열지 않는다. 몇 달, 심지어는 몇 년간 같이 생활하면서 온갖 일을 겪다가 마침내 자신들에 대한 한결같은 보살핌이 진짜 사랑임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온다.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상관없이 진정 사랑받는 존재라는 점을 깨닫는 그 순간이 바로 임계점이며, 그때부터 딱딱한 껍질이 깨지듯 마음이 풀리고 놀라운 변화가 시작된다. 난폭하고 속을 썩이던 아이가 밝게 웃으며 앞장서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 인간에게는 사랑이 전부라는 사실을 절감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 순간이 올 때까지 아이들이 계속 저지르는 잘못과 어두움을 그들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치유의 비결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것을 ‘어두움 받아들이기’라고 말했다.

소년재판을 하면서 나는 이 말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비 내리는 오후에 어느 청소년복지관을 방문했다. 보호처분을 받은 비행소년들을 수용하여 직업교육을 하는 곳이었다. 복지관의 관장은 뜻밖에도 50대 중반의 서양인으로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신부였다. 한국에서 수십 년 동안 청소년 일을 계속해 왔다는 그는 그곳의 청소년들에게 기울이는 애정이 대단했다. “아이들이 불량한 것 같지만 사실은 다 착하고 순수한 성품을 가졌어요. 전적으로 믿어줄 때 아이들의 자의식이 변하고 행동도 바뀝니다”라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깊은 감동을 받아 꽤 오래 청소년 문제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그곳의 교육시설과 기숙사를 둘러보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들고 갔던 우산을 그 방에 놓아두려 하자, 그는 “우산을 여기 두면 아이들이 훔쳐가요”라고 말하는 것 아닌가.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방금 아이들을 완전히 믿어야 한다고 역설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 어리둥절해 하는 나에게 그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우산이 없는 아이들이 이걸 보면 훔치고 싶지 않겠습니까, 나는 중요한 물건은 벽장에 넣고 자물쇠로 단단히 잠급니다.” 마치 청소년들이 우산을 훔치는 행위가 자연스럽다는 태도였다.
이때 나는 전율과 같은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아하, 청소년 문제가 이런 것이구나.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인간을 보는 법이 이런 것이구나!’ 그는 누구보다도 청소년들의 변화 가능성을 믿으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한계와 약점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들이 변하리라고 확신하면서도, 그들 속에 우산을 훔치려는 어두운 충동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아이들 내면의 빛이 타오를 것을 믿으며 그때까지 어두움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현실적인 균형감이 핵심이었다. 이 과정에서 계속하여 일탈하는 아이들의 어두움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좌절감을 줄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문득 나에게도 동일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내면에 선한 면과 악한 면, 관대함과 치졸함 등 빛과 어두움의 양극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자신의 약점과 추한 점은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자신의 어두움을 직면한다는 것이 괴롭기 때문에 밝은 면만 보며 자신에 대한 환상을 유지하려고 한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인간이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어두움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다. 어두움을 회피하면 자신과 멀어질 수밖에 없고, 자신의 양극성을 함께 수용해야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의 전부를 받아들여 통합된 사람만이 기대와 실망, 강점과 약점, 진지함과 유머를 함께 품으며 풍성한 성장을 할 수 있다. 자신의 두 발을 양극 위에 단단히 올려놓아야 어떤 일이 생겨도 넘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 후 나도 빛을 꼭 붙잡고 서되, 어두움을 피하지 않고 현실 위에 굳게 발을 딛고 살겠다는 마음을 늘 새롭게 하고 있다.



윤재윤 법이 치유력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소년자원보호자제도, 양형진술서제도 등을 창안하고 시행했다. 철우 언론법상을 받았으며 최근엔 수필집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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