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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목소리도 경청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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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동호
사회1부 내셔널팀장

박원순(55) 서울시장은 역시 서민의 시장이었다. 지난주 인터뷰를 위해 서울시장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을 때 받은 인상이다. 말투는 동네 아저씨 같았고 성격은 소탈했다. 저절로 친근감이 느껴졌다. 주변에서 그를 왜 원순씨라는 애칭으로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인터뷰에 앞서 그에게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가 쓴 『보수의 유언』을 선물했다. 올 초 기자가 번역한 것인데 그가 독서광으로 소문난 데다 혹시 서울 시정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책을 받아 든 그는 무척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책을 반듯이 책상에 올려놓는 그에게 “책 제목과 달리 진보와도 관련된 내용”이라고 귀띔했다.

 그렇다. 올해 93세인 나카소네는 이 책을 통해 일본 보수 정당인 자민당의 붕괴 원인을 진단했다. 반세기가 넘는 정치 경륜을 가진 그는 진정한 보수가 되기 위해서는 불역(不易)과 유행(流行)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원칙을 지키면서(불역) 시대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유행)는 의미다. 그러나 자민당은 기득권에 안주하고 포퓰리즘 정치의 함정에 빠져 시대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다. 버블 경제 붕괴 이후 경제와 사회가 침체에 빠졌지만 적절한 리더십 발휘에 실패했다. 나카소네는 국가를 위해 일하는 정치인이 되려면 누구든지 끊임없는 자기 혁신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누구나 현실에 안주하고 도그마에 빠지기 쉽다는 점에서 그의 ‘유언’은 진보들도 새겨들을 가치가 있다.

 박 시장은 이 시대 진보의 대명사로 통한다. 그는 “국민은 ‘여의도 정치’가 상징하는 구시대적 발상과 행태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또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소망이 매우 높다. 저나 안철수씨에 대한 지지나 기대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보수의 대명사로 불리는 한나라당의 정책을 대부분 부정한다. 수요공급을 원칙으로 해야 할 재건축에 공공성을 강화한다고 밝혔다. 대학생이 많아서 취업이 안 되는 판에 등록금을 최대한 낮추는 정책도 내놓았다.

 그가 일으키는 바람은 기대와 불안감을 동시에 갖게 한다. 그는 서울 시민에게 희망을 주겠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나는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의 시장이기도 하다. 경청하는 시장이 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금 걱정스럽다. 박 시장은 일본의 보수가 독단에 빠져 몰락한 것처럼 자칫 진보도 한쪽 귀만 열고 한 눈만 뜨고 있다 보면 역시 독선(獨善)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유념해야 한다. 그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목소리 외에 침묵하는 다수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접속자가 수십만 명에 이르는 인터넷 방송 ‘서울e야기’에서 자신을 경청하는 시장이라고 강조했다. 부디 반쪽 시장이 되지 말고 모든 서울 시민의 시장이 되기를 바란다. 더구나 시민운동가 출신이기 때문에 이제 서울시장을 호되게 견제할 시민단체도 많지 않다. 이번에는 그가 보수의 실패를 거울삼아 보수의 주장과 조언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차례다.

김동호 사회1부 내셔널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