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대지진 이후 가치관 바뀐 일본 근로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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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언
경제부문 기자

일왕(日王) 피서지에 문을 연 일본 최대 아웃렛 프린스쇼핑플라자(르포기사 11월 29일자 E3면). 나가노현의 가루이자와에 있는 이곳의 유스케 가시와기 매니저는 23일 “대지진 이후 자숙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홍보비를 줄였는데도 매출은 전년에 비해 10% 늘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체 상태이던 그룹 내 백화점 매출도 올해 성장세로 돌아섰다”고 덧붙였다. 다음 날 도쿄의 번화가 신주쿠. 퇴근 시간이 되자 사무실 밀집 지역 빌딩들의 불이 일제히 꺼졌다. 반대로 식당 등이 몰려 있는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일본 대지진 이후 처음 일본행 비행기에 오르며 침울한 분위기를 맞닥뜨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대지진으로 1만5000여 명이 사망하고 8000여 명이 실종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쇼핑몰과 식당·거리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활기가 넘쳤다. 어떻게 된 일일까.

 “내일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보다 오늘을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는 걸 대지진이 일깨워줬어요.”

 서울 청담동 거리가 벤치마크한 것으로 유명한 패션거리 오모테산도에서 만난 한 일본인의 말에 의문이 풀렸다.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라는 진부한 표현을 그들은 피부로 실감하고 있었다.

 실제로 대지진 이후 결혼을 서두르는 젊은이들이 늘었다고 한다. 대지진 이후 결혼정보업체 회원가입 문의는 15%, 결혼에 골인해 탈퇴하는 회원 수는 20% 늘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대형 재난 이후 사람 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풍토가 생긴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혼율도 증가했다. 의무감에 꾸려가던 가정을 포기하는 대신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는 부부가 늘어난 것이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대지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살아남은 이들을 진짜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올 9월 우리나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1만5665명. 동일본 대지진으로 사망한 이들과 맞먹는 수준이다. 하루 평균 42.6명이 자살한 것인데, 2000년 17.6명이던 것과 비교하면 2.5배가량 늘어난 수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자살률 1위,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지금 나는 행복한가?” 어쩌면 이 질문은 일본인보다 한국인에게 더 필요한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정선언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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