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의 전방위 예술가의 작품 망라

중앙일보

입력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올해 탄생 1백주년을 맞은 노작 홍사용 시인의 작품 전집이 나왔다. 노작문학기념사업회가 엮어 펴낸 〈홍사용전집〉(뿌리와 날개)은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김학동 교수의 〈홍사용전집〉(새문사)을 저본으로 삼아, 옛 표기법을 현대 맞춤법으로 바꾸어 일반 독자들이 읽기 쉽게 했다.

나도향, 박종화, 현진건 등과 함께 신문학 초기 문예지 〈백조〉를 내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홍사용은 한국 낭만주의 문학의 주요 시인. 특히 우리 민중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 민요 풍의 우리 시를 주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사용은 전국을 떠돌면서 민요를 채록하여 〈청구가곡〉이라는 민요집을 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민요를 자신의 시에 적극 도입한 김소월과 자주 비교되는 홍사용은 우리 문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단에서 그만큼의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적지 않은 작품을 냈음에도 〈나는 왕이로소이다〉외에는 그다지 알려진 시가 없을 만큼 소외된 형편이다.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민요를 채록하는 등 홍사용은 우리 민족의 내면에 뿌리 내리고 있는 고유 정서를 캐내고자 애썼던 시인. 그의 이같은 민족 정서 탐구 작업은 이후 연극으로 이어졌다. 극단 토월회에 참여하고 산유화회를 조직했으며, 자신이 직접 희곡을 창작한 것이 바로 그 예.

시와 연극을 향한 그의 열의는 예술을 통해 우리 민족 정서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문예지 창간과 신극 운동 등 문화예술 작업에 자신의 전 재산을 투여, 마침내 가산을 탕진하고 작품에서도 뜻을 펴지 못한 그는 한때 실의에 빠져 방랑생활을 하기도 했다.

문화운동 지식인으로서 민족이 처한 현실에 치열하게 맞섰던 홍사용은 1919년 삼일운동 당시에 학생운동에 가담한 이유로 구금되기도 했으며, 식민지시대 말기에는 일제에 협력하는 집필을 거부하다가 주거 제한 조처를 받기도 했다. 일제가 물러간 뒤에는 곧바로 '근국청년단'을 조직해 청년운동을 일으키려 했으나 지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47년 마흔여덟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냇물이 흐르며 노래하기를
외로운 그림자 물에 뜬 마름 잎
나그네 근심이 끝이 없어서
빨래하는 처녀를 울리었도다

돌아서는 님의 손 잡아다리며
그러지 마셔요 갈길은 육십 리
철없는 이 눈이 물에 어리어
당신의 옷소매를 적시었어요

두고 가는 긴 시름 쥐어틀어서
여기도 내 고향 저기도 내 고향
젖으나 마르나 가는 이 설움
혼자 울 오늘 밤도 머지 않구나

(1923년 작, 〈흐르는 물을 붙들고서〉 전문)

이번에 노작문학기념사업회에서 엮어낸 〈홍사용 전집〉에는 그의 시편 뿐 아니라,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등을 총망라했다. 전방위 예술가로서 홍사용의 전 면모를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읽기 쉬운 현대 맞춤법으로 고쳐 쓴 것에 대해 학계에 논란이 있을 수도 있지만, 퀴퀴한 골방에서 대중이 살아 숨쉬는 현장으로 홍사용을 내놓는 데에는 효과적일 것이다.

다양한 장르의 예술 작품을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발표할 수 있는 유리한 여건이 마련된 요즘 자기 전공 분야에서 약간의 변형만 시도해도 매스컴들은 '문화 게릴라'니 '전방위 예술가'니 하는 도전적 용어를 사용해 호들갑을 떤다.

이같은 요즘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자신의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아낌 없이 전 재산을 신극 등의 문화예술 운동에 투자했던 홍사용의 재조명은 절실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 정서와 자존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희곡, 소설, 평론 등 장르를 넘나드는 게릴라적 종합 예술인 홍사용. 또한 전국 방방곡곡을 몸소 떠돌며 민요를 채록했으며, 때로는 연극 연출에까지 직접 나섰던 홍사용의 전방위 예술 활동에 대해서 우리는 꼭 한번 짚어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문학과 예술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져내는 디딤돌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새 모습으로 독자들 앞에 나온 〈홍사용 전집〉그래서 더 없이 반갑기만 하다.

서울은 왜 이러하냐. 왜 이리도 답답하고 괴로웁고 쓸쓸하고 더러웁고 망칙스러우냐. ………… 아, 서울은 무서웁다. 서울은 지겨웁다. 나의 길이길이 살 영주(永住)의 낙토는 어느 곳에 있느냐. 나의 그리운 그 고향은 어느 쪽으로부터 서 있느냐. ………… 나는 다시금 조선의 예술이 그리웁다. 우리 조상들의 내리어준 그 예술이 그리워 못 견디겠다. 예술로 불린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찬란하였으며, 우리의 가승(家乘)은 얼마나 혁혁하였느냐. 시방은 물론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모두 없어져 버리었다. 모두 어느 시절에 어느 곳에든지 사라져 버리었다. 그러나 우리가 있지 아니하냐. 우리가 살아있지 아니하냐.
- 수필 〈그리움의 한 묶음〉에서 (이 책 278-280 쪽에서)

홍사용이 스물 네 살의 젊은 나이에 쓴 글의 한 조각이다. 우리는 어쩌면 홍사용 앞에 모두가 죄인이다.

고규홍 Books 편집장 (gohkh@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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