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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나의 여행 이야기 ② 영화감독 이명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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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을 찾아다니는 여행이어서 그랬는지 자연스레 많은 물길을 만날 수 있었다. 물과 숲의 기운을 받아 매일매일 명상하는 기분이었다.

미련 없이 태국으로 결정했다. 준비하고 있는 영화 ‘미스터 케이’의 무대가 방콕이기 때문이었다. 태국으로 출발 전 ‘나에게 여행의 의미란 무엇인가’ 하고 잠깐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에게 여행은 이미지 만들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이미지’와 ‘여행’은 닮은 구석이 많았다. 분명한 실체는 있지만 그 실체를 찾아야 알 수 있는 것. 첫사랑처럼 떠난 뒤에나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알게 되는 것. 퍼즐처럼 비로소 조각이 맞춰질 때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 여행과 이미지는 그렇게 닮아 있었다.

 내게 있어 이미지란 ‘있는 그대로 대상을 사랑하기’다. 있는 그대로 사랑할 뿐이다. 가끔은 다가가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고, 끌어안기도 한다. 조급증 때문이다. 그럴수록 대상은 모습을 감추거나 거리를 둔다. 그럴 때면 너무 원망스러워 대상에서 등을 돌리거나 대상을 향해 소리치기도 한다. 그러나 소용없고 부질없는 짓임을 경험을 통해 뼛속 깊숙이 알고 있다. 결론은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다. 내게 있어 이미지란 처음부터 기다리는 대상이었다. 그저 사랑하고. 그저 묵묵히 기다리기.

수상시장으로 알려진 담넌사두악 일대를 찾았다. 홍수로 인해 관광객이 크게 줄어 오히려 시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판 007을 표방한 다음 작품 ‘미스터 케이’를 구상하면서 ‘이번에는 절대 관객의 예상을 벗어나지 말자’고 다짐했다. ‘절반의 익숙함과 절반의 새로움’을 균형 있게 가지고 가는 것이 이번 영화의 목표다. 당연히도 007류의 영화니까 절반의 익숙함을 드러내자면 이국적인 풍경이 필요했다. 하지만 흉흉한 뉴스가 발목을 붙들었다. 몇 십 년 만의 물난리로 방콕 전체가 물에 잠겼다는 것이다. 설상가상 전염병도 창궐하고 있다는 소문마저 들려왔다. ‘그래도 간다’ 결심을 하니까 마치 내가 오지 탐험대의 일원이 된 느낌이 들었다.

 태국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바로 훅, 더운 열기와 함께 오줌 지린 것처럼 바지가 축축해진다. 이번 여행에 동행한 이병률 시인이 더위에 강하냐고 물었을 때는 겨울보다는 더운 것이 낫다고 큰소리 뻥뻥 쳤는데, 헉! 내가 예상했던 더위는 이게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더위는 잠시뿐이었다. 금방 어디선가 선선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방콕 중앙역에서 만난 스님. 평범한 인사 대신 어디를 가시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눈으로만 그 인사를 대신했다.
파타야 바닷가의 ‘진실의 사원’은 나무로만 지은 건축물이라 부식된 부분을 수리하고 정비하느라 세워진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짓고 있는 중이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로 잘 알려진 명소 ‘콰이강의 다리’는 우리에게 서로 싸우지 말고 그 시간
에 산책하라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 같다.
태국의 사원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수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넘치는 것은 바로 태국 사람들의 함박 미소.

11월부터 1월은 태국의 건기로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즌이다. 촬영 목표로 잡고 있는 내년 3월부터 5월은 태국의 본격적인 여름으로 습도도 높고 혹독하게 덥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건 관광 책자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고, 한국의 여름과는 달리 햇볕은 뜨겁지만 지금처럼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하다고 한다. 직접 몸으로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쨌든 촬영을 생각하자니 안심이 되는 말이다.

둘째 날 오전 7시. 전쟁 영화의 고전 ‘지옥의 묵시록’이나 ‘플래툰’, ‘디어 헌터’의 분위기와 같은 정글을 찾기 위해 태국과 라오스의 국경지대인 우돈타니로 출발했다. 비행기도 타고 차도 타고 가는 내내 온통 앞에 열거한 영화의 몇 장면이 머릿속에 돌아가고 있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찾는 정글은 없고 메콩강을 사이에 둔 긴 다리 하나만 덜렁 ‘우정의 다리’라는 동판을 걸고 놓여 있었다.

 헌팅 첫날이라, 첫술에 배부를 순 없겠지만 그래도 좀 맥이 빠진다. 그런 나를 위로하듯이 이병률 시인이 이번 영화를 위해 근처 사원에 가서 기도를 하자고 한다. 나는 부처님이나 하나님이 인간의 기도를 들어주는 존재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불교국가인 태국을 알기 위해서는 볼 필요가 충분했다. 이미지란 언제 어디서 어떤 인연으로 조립될지 모르니까.

 태국 곳곳의 식당이나 집을 들여다보면 어디든 국왕의 사진이나 스님의 사진 한 장쯤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군부의 실력자라도 국왕 앞에서는 몇 걸음 전부터 무릎을 꿇고 기어서 인사드린다. 그런 국왕도 스님한테는 무릎을 꿇는다. 태국에는 ‘부엇’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태국에서 태어난 남자라면 누구든 한 번은 절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제도다. 태국의 아들들은 승려 생활 동안 쌓은 공덕이 어머니에게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국왕도 예외가 없다. 그만큼 불교는 이 나라를 받치는 핵심이다. 부엇은 의무는 아니지만 효를 중심에 놓는 태국에서는 일종의 신용카드와도 같다. 인간 됨됨이를 판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장가를 잘 가기 위해서라도 꼭 한 번은 승려 생활을 거쳐야 한단다. 그러니까 일종의 기준과 같은 것이다.

 태국의 절은 사원으로서의 기능만 아니라 교육의 측면을 맡고, 사회보장제도 기능도 함께한다. 일정 나이가 되어 직장에서 은퇴한 사람은 자식들과 살거나 요양원으로 가지 않고 절로 간다. 가끔 TV에서 볼 수 있는 머리를 빡빡 깎은 어린 승려들도 승려가 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받기 위해 단기간 절에 있는 것이 대부분이란다. 각계각층에서 은퇴해 절로 들어온 사람들이 이런 나이 어린 승려를 교육한다. 태국의 국가 시스템에서 왕족과 국왕은 절에 많은 시주를 하게 되어 있고, 그 돈이 바로 가난한 아이들의 교육이나 은퇴한 사람들의 생활을 위해 쓰인다.

 자동차가 농싸이 국립공원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두 눈을 부릅뜨고 곳곳을 살폈지만 흔히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숲길을 따라 그나마 있다는 폭포를 찾아 갔으나 겨우 1m 높이 미니어처 수준의 폭포였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정을 바꿔야만 했다. 영화의 주무대인 방콕 일정을 하루라도 더 늘려서 구석구석을 시간 들여 보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때 결코 물이 맑다고 할 수 없는 폭포 근처에서 단란하게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한 가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파리들이 음식을 덮고 있지만 누구 하나 손을 내저어 파리를 내쫓지 않았다. 문득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는 더러운 해충이겠지만 저들은 분명 파리와 음식을 나눠먹고 있는 것이리라.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환락가라고 불리는 카우보이 거리를 지나 휘황찬란한 불빛이 압도하는 팟퐁 거리에 들어섰다. 그 모습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꺼냈지만 몇몇 상인이 촬영은 금지되었다며 막았다.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담아두는 수밖에 없었다. 온통 형광등으로 불을 밝힌 상점을 중심으로 양쪽 길게 늘어선 클럽에서는 시끄러운 음악이 터져 나오고 열린 문 안으로는 비키니 차림의 여성들이 지나가는 행인을 유혹하며 손짓하고 있었다. 한 블록 옆에는 깊고 푸른 불빛 아래 길 양 옆으로 노천카페가 늘어서 있고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여행자들이 각자 풍부한 표정을 지으며 술잔을 들고 있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었지만 금방이라도 그 분위기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틀 뒤 만난 리빙 필름의 프로듀서인 올리버에게 팟퐁 지역에서 영화 촬영 자체가 어려운 이유를 들었다. 너무 범위가 넓고 상인 분포가 조밀조밀해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돈만 있다면 문제는 다르다. ‘Money controls everything(돈이면 뭐든지)’. 차이나타운 역시도 마찬가지여서 차이나타운을 관할하는 세 개 경찰서가 있는데 한 곳에만 돈을 줄 경우 절대 촬영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일은 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이미지는 책상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책상 너머에 있다.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일 역시 돈이 든다. 이미지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 첫째로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은 경제성이다. 그것이 산업과 예술의 쌍두마차라는 운명을 갖고 태어난 영화예술의 숙명인 것이다.

 여섯째 날. 아침부터 서둘러 엄마의 젖줄이라고 불리는 메낭 차오프라야 강변의 호텔을 넉넉히 둘러보고 방향을 돌려 깐짜나부리로 향했다. 대나무로 엮은 뗏목 위에 올라탔을 때만 해도, 미얀마에서 온 젊은 뱃사공이 노를 저어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만 해도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마틴 신이 말런 브랜도를 찾아나서는 느낌이 선뜩선뜩 들었다. 그러나 좌우를 살펴봐도 내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와 닮은 곳을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연 ‘디어 헌터’를 찍은 촬영지는 어디일까? 고전영화의 무대인 ‘콰이강의 다리’에 올라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조금 복잡해진 머릿속을 헹군다.

파타야의 바닷가에 있는 진실의 사원 쁘라삿싸차탐진실의 사원에 들러 노을이 비쳐드는 나무 사원을 걸었고, 그 다음 날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 등장하는 태국 중앙역에 들러 오리엔탈 익스프레스가 도착하고 떠난다는 3번 플랫폼에서 서성거렸고, 미로처럼 골목이 펼쳐져 있는 끄렁떠이의 판자촌에도 들러봤다. 머릿속에서는 그동안 보고 들은 것이 이미지가 되어 하나 하나 조립되면서 편집되고 있었다.

 이번에 차곡차곡 담아낸 이미지는 곧 스크린 위에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나에겐 꿈이 남아 있고,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다. 그 이미지가 터져나올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 그것은 어쩌면 속 깊은 여행의 두근거림을 닮았다. 미처 내 마음이 가닿지 못한 어느 첫사랑의 한때처럼 나는 묵묵히 어느 한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글=이명세, 사진=이병률

●이명세는 … 영화감독. 1957년 충청남도 아산 출생. 88년 영화 ‘개그맨’으로 데뷔. 대표작으로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첫사랑’ ‘남자는 괴로워’ ‘지독한 사랑’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형사’ ‘M’ 등이 있다. 아태영화제 신인감독상을 비롯해 도빌아시아영화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백상예술대상,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등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병률은 … 시인.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과 여행산문집 『끌림』을 펴냈다.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했다.

나의 여행 이야기는 삼성카드와 함께 합니다

이명세에게 여행은 … 이미지 만들기다
두근두근 방콕의 밤
‘콰이강의 다리’에 올라 흐르는 강물에 마음 헹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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