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열매 떨어지는 소리는 지상의 악기소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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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열매 떨어지는 소리는 지상의 악기소리다   -   이기철(1943~)

소나무 Pinus densiflora 솔방울

열매 떨어지는 소리는 지상의 악기 소리다

설핏 돌아보는 가을의 낯이 취객처럼 붉다

몸을 숨긴 벌레 울음이 풀숲 뒤에서 대패질 소릴 낸다

모본단 옷으로 갈아입고 바쁘게 지나가는 햇살

그늘 속으로 발을 굴리며 떨어지는

열매는 실로폰 소리를 낸다

나무가 이태 동안 온 힘을 내어 맺은 열매가 툭 떨어졌다. 소나무가 솔방울을 제대로 맺으려면 두 해가 걸린다. 송화 꽃가루받이 이룬 뒤에 비바람 눈보라를 두 번이나 맞아야 알알이 솔씨가 여문다. 잘 여문 솔방울이 대지의 품에 편안히 안겼다. 바람이든 사람이든 새 보금자리로 솔씨를 옮겨 갈 차례다. 새 생명을 준비한 소나무가 이룬 노동의 수고는 그래야 마무리된다. 열매 떨어지는 소리가 늦은 가을의 교향악처럼 울리는 건 열매 안에 담긴 생명 때문이다. 솔방울 내려앉은 길섶 위로 드리운 땅거미의 붉은 표정 따라 생명의 노래가 잔잔히 흐른다. 이제 모든 나무들이 소리 없이 새 생명을 잉태해야 할 겨울이다.

<고규홍·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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