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푸른 빛이다…〈별이 빛나는 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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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밤. 하늘은 푸르다. 푸른 빛에 놀라 어둠은 주춤한다. 대담하고 강렬한 별빛은 어둠의 접근을 절대 허락치 않을 것이다. 하늘은 푸르기만 할 것이고 지금 온통 푸르다. 청량한 바람 역시 푸른 빛이다. 그야말로 세상은 온통 푸르다. 별은 흰꽃처럼, 혹은 녹색의 수련처럼 하늘하늘 빛으로 유영한다. 별은 그리움으로 출렁이며 이곳까지 밀려 온다. 저 멀리 실내를 밝힌 등은 반짝 조명처럼 하늘을 새하얗게 밝힌다. 여름밤이 이렇게 청량했으면 한다.

뭉크의 〈별이 빛나는 밤〉(1923∼24)이란 그림. 화사한 색채와 분위기에 우선 시야가 쾌청해지는 듯하다. 화사한 풍경에 취하다 보니 뭉크의 그림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아마도 뭉크의 그림 중에서 가장 밝고 투명한 작품이리라.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검고 탁한 색채는 따뜻한 온기를 간직한 노란 등불과 저 멀리 황혼처럼 하늘을 가르는 붉은 띠, 그리고 화면을 뭉게구름처럼 희게 가르는 색면에 의해 위축된 상태다. 더구나 뭉크는 원근이 간파되는 대담한 구도와 경쾌한 붓터치를 사용하여 신비감을 고조시키는 것 아닌가. 빛이 물결처럼 일렁이는 느낌을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황혼녘의 외침을 통해 인간내면의 절망을 극적으로 표현한〈절규〉 등의 그림이 차라리 '뭉크'라는 인칭대명사에 가깝다. 뭉크는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두려움과 공포를 거칠고 과격하게 표현하는데 탁월했다. 자신의 그림 자체가 고통스런 삶의 고백이 아니었던가. 그는 자연의 풍경마저도 불안한 내면을 강조하는 극적인 무대장치로 전환시켜왔다. 그의 풍경은 음산하고 우울하고 처연했다. 간혹 우리가 그의 풍경에서 두려운 환영을 보는 듯한 환각에 빠지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의 이런 성향은 인간의 내면을 자극적으로 표출하는 표현주의 미술양식을 널리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고, 특히 독일의 다리파에게 영향을 미쳤다. 기괴하고 어두운 그림을 그린 크림트과 쉴레 등이 그를 따랐다. 그들은 폭력적으로 관객의 예술적 감수성을 거칠게 테러했다. 관객들은 망연자실 기괴한 환각에 사로 잡혔다. 뭉크는 프로이트와 니체 등과 동시대를 호흡하며 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광기와 무의식을 화폭에 재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뭉크가 유독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해 민감하게 반응했고 줄곧 이를 과장되게 혹은 자극적으로 표현한 까닭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체로 그가 경험한 유년기의 상처를 가장 큰 이유로 든다. 그는 노르웨이에서 군의관 아버지와 독실한 신앙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이러한 조건만 따진다면 그는 퍽 유복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출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유년은 순탄치 않았다.

어머니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다섯 살이었고 어머니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어머니를 여윈 상실감과 애정결핍은 어린 뭉크의 영혼을 갉았다. 그는 사랑의 대상을 누이에게서 찾았고 다행히 누이로부터 심리적인 안정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그러나 누이마저 야속하게도 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그때 누이의 나이 14살이었다. 모성에 대한 본능적인 요구는 묵살당했고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으로부터 잔인하게 단절되었다. 격리되었다. 아이는 가족의 죽음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어렸던 것이다.

뭉크는 유년기부터 죽음의 환각에 시달렸고 어린 시절 내내 잦은 병치레와 정신착란의 고통을 호소했다. 그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훗날 자신의 유년기를 죽음의 그림자로 가득 찬 삶이었다고 회상했다. 죽음의 마수는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그를 따라 다니며 괴롭혔다. 그의 그림의 주제가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관한 것이었음은 어쩌면 당연했으리라.

20세기 들어 뭉크는 구설수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위험한 폭발물이었다. 폭행과 구속, 권총사고와 도피, 피해망상증과 정신치료, 그리고 휴양. 그의 심신은 탈진해 있었다. 급기야 병마는 그를 어두운 심연으로 내팽개쳤다. 표류했고 방랑했다. 그의 그림의 주제는 여전히 삶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었다. 그러나 뭉크는 집요하게 덤비는 병마와 고독을 정력적인 작품활동으로 극복했다. 그 증거가 바로 이 작품〈별이 빛나는 밤〉이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유년기의 상처를 어떤 방식으로든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한 인간의 고투를 목격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상처를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가 공과대학에 진학한 후 끝내 화가가 된 것도 이 때문이리라. 그는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리얼하게 그려냈고 자신의 운명에 저항했다. 〈별이 빛나는 밤〉은 고통을 감내한 예술가의 면모가 얼마나 아름다운 지를 잘 보여준다. 이는 동일 제목의 1893년의 그림과 비교하면 잘 이해할 수 있다.

절망은 이처럼 인간을 단련시킨다. 노신 역시, "절망도 희망이다. 절망은 오히려 마음의 좌절과 굴복에 지나지 않는다."(〈野草〉)라며 절망에서 솟구치는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별처럼 빛나는 생. 하단부에 실루엣으로 처리된 그의 그림자는 별을 행복하게 응시하는 듯 하다. 그는,

중천에 얼어 있는 눈부신
햇살처럼.
외로움의 절벽으로 스스로를 지키는

-----〈장미의 가시·언어의 가시〉(허만하)

처럼 홀로 우뚝하다.
희망은 이처럼 푸른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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