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명예의 전당 (6) - 프랭크 베이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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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역사가들은 1920년 이전의 시대를 '데드 볼 시대'라 부른다. 이 시대의 특징은, 공의 탄력이 별로 없고 스핏볼(침을 발라 던지는 구질) 구사가 가능하여 홈런이 극히 적었다는 것이다. 자연히 이 시대에는 홈런를 날리는 능력은 거의 무시당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 장타력으로 이름을 날린 선수가 있었다. 프랭크 "홈런" 베이커가 바로 그 선수이다. 3루수였던 그는 1910년대 초반 AL에서 4년 연속으로 홈런왕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하였으며, 1911년 월드 시리즈에서 그가 날린 홈런들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비록 수백 개의 홈런을 날린 후대의 강타자들에 비해 그의 홈런 수는 초라해 보이지만, 그는 1910년대의 기준으로 보면 최고의 홈런 타자였다.

만약 베이커가 데드 볼 시대가 끝난 후에 활약했다면, 그는 한 시즌에 40홈런 이상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그는 3루수라는 포지션에 대한 고정 관념을 가장 먼저 깨뜨리는 선수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전반기에는 3루수는 유격수보다 더 수비지향적인 포지션이었다. 3루수 자리에 좋은 타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명예의 전당 멤버 중 3루수로 활약한 선수가 가장 적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나마 파이 트레이너나 조지 켈과 같은 뛰어난 교타자들은 간혹 나타났지만, 파워를 갖춘 3루수는 극히 드물었다. 3루수 자리가 파워 히터들의 위치로 인식된 것은 에디 머튜스와 그레이그 네틀즈 등이 등장한 후이다.

베이커가 실제보다 10년 정도 후에 활약하였다면, 그는 많은 홈런으로 팀의 승리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했다면, 1980년대 이후 칼 립켄 주니어 등의 영향으로 유격수 자리에 좋은 타자가 많아진 것처럼 베이커로 인해 3루수 중 강타자가 일찍부터 늘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베이커는 정확한 타격과 뛰어난 주루 플레이로도 명성을 날렸다. 그는 동시대에 활약한 타이 캅이나 트리스 스피커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191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들에 대해 거론한다면 그의 이름을 빼놓을 수는 없다.

베이커는 1908년 카니 맥 감독이 이끄는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 입단하였으나, 첫 해에는 그다지 출장 기회를 잡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09년부터 주전 3루수로 기용되었으며, 이 해에 0.305의 타율을 기록하는 동시에 85타점을 올려 이 부문에서 리그 3위에 랭크됨으로써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그는 이 해에 3루타 부문에서 19개로 수위에 올랐다.

그는 1910년 일시적으로 부진을 보였으나, 이 해에 팀은 치프 벤더와 잭 쿰스가 도합 54승을 올리는 활약을 보인 데에 힙입어 AL 챔피언에 올랐다.

하지만 월드 시리즈에서 만난 상대는, 정규 시즌에 13게임 차로 NL우승을 차지한 강팀 시카고 커브스였다. 더구나 팀의 간판 투수인 에디 플랭크가 부상을 당하여, 애슬레틱스의 우승 전망은 결코 밝지 않았다.

그러나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베이커는 3안타와 2타점을 올리는 대활약을 하였고, 이후 계속 맹타를 휘둘러 이 시리즈에서 0.409의 타율을 기록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영웅적인 활약에 힘입어 애슬레틱스는 막강 커브스를 4승 1패로 손쉽게 제압하여 첫 우승을 따냈다.

이듬해인 1911년 애슬레틱스는 다시 AL을 제패했다. 2연패의 가장 큰 원동력은 베이커와 2루수 에디 콜린스, 1루수 스터피 매키니스와 유격수 잭 배리로 구성된 당대 최고의 내야진이었다.

기자들은 이들을 '10만 달러의 내야진'이라 불렀는데, 이는 이 4명의 연봉을 합친 액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10만 달러는 대단한 액수였다.

베이커는 이 해에 더욱 향상된 기량을 과시했다. 그는 115타점으로 이 부문 2위에 랭크되었으며, 11개의 홈런을 날려 홈런왕에 올랐다. 당시에는 홈런왕이라는 칭호가 오늘날처럼 큰 의미를 가지지는 못했지만, 그가 당대 최고의 스타 중 하나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게 되었다.

이 해에 애슬레틱스는 다시 리그 정상에 섰고, 1905년 월드 시리즈에서 뼈아픈 패배를 안겨 주었던 뉴욕 자이언츠와 다시 대결하게 되었다. 명감독 존 맥그로가 이끄는 자이언츠는 이 해 정규 시즌에서 347개라는 경이적인 수의 도루를 성공시켜 이 부문 20세기 최고 기록을 세웠으며, 크리스티 매슈슨과 루브 마콰드 등의 대투수들로 무장한 강팀이었다.

특히 6년 전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시리즈 3완봉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수립했던 매슈슨은 여전히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고 있었다.

자이언츠의 홈 구장 폴로 그라운드에서 벌어진 시리즈 1차전에서 베이커는 2회에 매슈슨을 상대로 안타를 쳤고, 결국 홈까지 밟아 선제 득점을 올렸다. 그러나 결국 팀은 역전패했고, 매슈슨은 완투승을 올렸다.

2차전에서 자이언츠는 시즌 중 24승을 올린 신예 투수 마콰드를 등판시켰고, 그는 5회까지 애슬레틱스의 타선을 1점으로 막았다. 이 상황에서 베이커의 진가가 발휘되었다.

양팀이 1-1로 팽팽히 맞서고 있던 6회에 애슬레틱스의 콜린스는 2루타를 뽑았고, 다음 타자로 나선 베이커는 마콰드의 몸쪽 공을 받아쳐 폴로 그라운드의 우측 담장을 그대로 넘어가는 홈런을 날렸다. 3-1. 이 스코어는 결국 경기가 끝날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3차전을 앞두고 존 휠러라는 기자가 머튜슨에게 조언을 했다. 그 내용은 "베이커에게 몸쪽 공을 던지는 것은 위험하다. 마콰드처럼 실수를 하지 말라."라는 것이었다. 매슈슨은 그 조언을 충실히 따랐고, 경기 종반까지 1-0의 리드를 지켜 다시 승리를 낚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9회 1사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베이커는, 머튜슨의 바깥쪽 공을 통타하여 폴로 그라운드의 우측 담장 위로 날렸다. 경기는 1-1 동점이 되어 연장에 접어들었고, 쿰스와 매슈슨이 완투 맞대결을 펼친 끝에 애슬레틱스가 3-2로 승리를 따냈다.

결국 이 시리즈에서 애슬레틱스는 4승 2패로 승리, 6년 전의 빚을 갚았다. 베이커는 이제 영웅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홈런 베이커'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듬해 베이커는 다시 홈런왕에 올랐으며, 130타점을 올려 처음으로 이 부문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이어 1913년 그는 보스턴 레드 삭스의 트리스 스피커와 공동으로 홈런왕에 오르는 동시에 타점 부문을 2연패하는 활약을 펼쳐, 팀을 다시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월드 시리즈에서 대결한 상대는 또다시 자이언츠였다.

마콰드가 선발 등판한 1차전에서 베이커는 4회에 안타로 타점을 올린 데에 이어 5회에 2점 홈런을 날려, 그의 진가를 재확인했다. 이 시리즈에서 베이커는 0.450의 타율을 기록하여 다시 팀 우승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1914년 베이커는 4연석 홈런왕 등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으며, 타율에서도 0.319로 4위에 오르는 등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이 시즌을 마친 뒤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제임스 길모어를 필두로 한 투자자들은 1913년 '페더럴 리그'라는 새로운 리그를 결성하여 기존의 양대 리그에 강력히 도전해 왔고, 이듬해에 접어들어서는 새 리그로 선수들이 빠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구단주들이 선수들의 연봉을 인상해 주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애슬레틱스의 구단주이기도 했던 맥 감독은 그렇지 않아도 연봉이 비싼 자기 팀의 선수들에게 더 많은 연봉을 지급하려 하지 않았다.

1914년 월드 시리즈에서 애슬레틱스는 보스턴 브레이브스에 충격적인 4전 전패를 당했고, 이를 빌미로 삼아 맥은 오히려 선수들의 연봉을 삭감하려 하였다. 베이커는 이에 강력히 반발하였으며, 그와 맥 감독 사이의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베이커는 1915년 시즌 내내 전혀 출장하지 않았다.

1916 시즌을 앞두고, 맥은 3만 5천 달러를 받고 베이커를 뉴욕 양키스에 넘겼다. 그는 뉴욕에서 맞은 첫 해에 3할을 한참 밑도는 타율을 기록하였으나,10홈런으로 팀 동료 월리 핍에 이어 이 부문 리그 2위를 차지하여 장타력은 녹슬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이후 1919년까지 그는 계속 홈런과 타점 랭킹에서 상위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1920년, 그는 투병 생활을 하는 아내 때문에 전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결국 아내는 사망하였고, 그는 시즌이 끝날 때까지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21년 그는 다시 돌아왔으나, 그의 기량은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의 강점인 장타력은 레드 삭스에서 트레이드되어 온 강타자 베이브 루스 때문에 빛을 잃었으며, 핍과 로저 페킹포 등이 팀의 중심 타선을 구성하여 베이커의 설 자리를 좁아지게 했다.

결국 베이커는 1922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하였다. 이후 그는 이스턴 쇼어 리그라는 마이너 리그에서 감독 생활을 했으며, 젊은 유망주 지미 팍스를 발굴해 냈다. 베이커는 1925 시즌을 앞두고 팍스를 맥 감독의 애슬레틱스로 보내었고, 이후 팍스는 루 게릭과 함께 역사상 최고의 1루수로 꼽히는 대스타가 되었다.

이후 베이커는 1963년 사망할 때까지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는 1955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존 프랭클린 베이커 (John Franklin Baker)

- 1886년 3월 13일 메릴랜드 트랩 출생
- 1963년 6월 28일 메릴랜드 트랩에서 사망
- 우투좌타
- 1908~1914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 3루수
- 1916~1922 뉴욕 양키스 3루수
- 통산타율 .307 1838안타, 96홈런, 235도루, 987타점
- 명예의 전당 헌액 : 1955년 (by Veterans Committ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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