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메이저리그역사 (5) - 지명타자제도

중앙일보

입력

1973년 메이저리그에 '경천동지'할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아메리칸 리그가 '지명타자제도'를 채택하게 된 것.

한국프로야구의 지명타자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오히려 내셔널리그에서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는 것이 더 특이한 모습이겠지만, 그 당시 지명타자제도는 상상도 못할 일에 가까웠다.

1920년 스핏볼이 금지되고 베이브 루스가 등장하여 '홈런 열풍'이 불면서 메이저리그에는 '타자의 시대'가 열렸다. 베이브 루스를 위시하여, 루 게릭, 테드 윌리암스, 스탠 뮤지얼, 조 디마지오, 미키 맨틀, 지미 팍스, 멜 오트 등 강타자들이 즐비했으며, 투수들은 그들의 춤추는 방망이를 버텨낼 수 없었다.

결국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1963년 스트라익존을 확대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운드의 높이를 높히는 등 방망이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이 조치들은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60년대 후반부터 메이저리그는 오히려 '투수의 시대'를 맞게 된다.

그러나 '투수의 시대'는 '타자의 시대' 보다 더 혹독했다. 양팀 합해 5점 이상의 점수가 나는 경기가 드물었고, 이것은 흥행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되자 메이저리그는 다시 타자들을 위한 조치로써 스트라익존을 좁혔고, 마운드 높이를 13인치에서 다시 10인치로 낮추었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투고타저' 현상은 아메리칸 리그가 더 심했다. 1972년 '투고타저'가 극에 달한 아메리칸 리그는 내셔널 리그 보다 200만 달러 적은 수입을 기록하게 되면서, 무언가 특단의 조치를 찾아 나섰다.

그들이 찾은 첫번째 해결책은 인터리그였다. 하지만 그당시까지도 아메리칸 리그를 한 수 아래라고 여기고 있었던 내셔널 리그 측에서 인터리그의 제안을 거부했고, 아메리칸 리그는 차선책으로 결국 '지명타자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훗날 인터리그는 1997년에 도입되어 메이저리그 흥행에 큰 도움이 됐다.)

아메리칸 리그가 지명타자제를 도입한 1973년 아메리칸 리그의 평균타율은 무려 2푼이 올라 .259가 됐다. 하지만 이것은 당초의 기대치보다는 아래였는데, 이것은 지명타자제 하에서는 투수가 1명의 전문타자를 더 상대하게 되어 많이 불리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타격의 부담을 덜게된 투수들이 오히려 편안한 피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아메리칸 리그는 내셔널 리그 보다 공격적인 리그로 인식됐다. 그러나 이것은 꼭 지명타자제의 영향이라기 보다는 이후 아메리칸 리그가 좋은 타자들의 영입에 주력하는 등, 타선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타선위주'와 '투수력위주'라는 뚜렸한 색깔을 갖게된 양대 리그. 하지만 최근에는 양대 리그의 색깔이 서서히 바뀌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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