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ro 2000] 유고슬라비아·슬로베니아 관전평

시작부터 고전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슬로베니아는 전혀 위축됨 없는 경기로 자신감 있는 적극적인 플레이를 전개했고 반면 유고는 전반 초반 계속되는 슬로베니아의 적극 공세에 다소 당황해하는 기미를 보였다.

첫골은 의외로 쉽게 터졌다.
전반 22분 슬로베니아의 칼리치가 프리킥 해준 볼을 슬로베니아 축구의 영웅 자호비치가 뛰어들며 헤딩으로 성공시키는 순간 유고의 관중석엔 일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이어지는 슬로베니아의 주도적인 공격.
전반 슬로베니아는 좌측의 루도니아와 칼리치가 적극적인 공간 플레이를 펼쳐주며 분위기를 주도해 갔고 플레이 메이커로 나선 파블린의 원활한 연결 역시 돋보였다.
또한 전방에 배치된 우도비치와 자호비치의 적극적인 문전쇄도가 측면으로부터의 연결과 맞아떨어지면서 유고 진영을 쉽게 교란시킬 수 있었다.

반면 유고는 초반부터 우측 공격을 주로 시도했지만 데얀 스탄코비치의 부진한 플레이와 롱패스 위주의 부정확한 볼 마무리가 계속되면서 공격의 흐름을 스스로 끊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유고는 스탄코비치를 빼고 미드필드에서 플레이를 조율할 수 있는 노장 스토이코비치를 투입하면서 분위기 반전을 꾀해 보지만 전반은 이렇다할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후반 들어 안 풀리는 게임에 신경이 사나와진 유고 선수들은 거친 플레이로 일관했고 슬로베니아는 앞선 상황에 전력상 객관적인 열세를 보이는 팀들이 보통 택하게 되는 수비 위주의 역습 전략 대신 유고의 공격에 전반과 변함 없는 적극 대응으로 임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이미 페이스를 잃은 유고 진영을 더욱 힘겹게 만들게 되고, 후반 시작한지 단 7분만에 슬로베니아는 추가 골을 성공시킨다.
자호비치의 오른쪽 페널티 에어리어 정면에서의 프리킥을 파블린이 헤딩으로 골네트를 갈라 단숨에 스코어는 2대0.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고의 베테랑 수비수인 미하일로비치가 골키퍼에게서 받은 볼을 패스하는 순간 페널티 아크 정면에서 이를 가로채기한 자호비치가 침착하게 골문 안쪽을 노려 순식간에 스코어는 3대0.

또한 2분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미하일로비치가 슬로베니아 공격수를 넘어뜨리면서 퇴장을 당하면서 슬로베니아의 생각지 못했던 완승이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위기 의식을 느낀 유고의 무차별 공세가 시작된다.
숫적열세에도 불구하고 다급해진 유고는 점차로 미드필드에서 볼키핑력과 기동력이 살아나면서 기회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고 미하일로비치의 퇴장은 어느새 팀에 새로운 응집력을 불러일으키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한편 슬로베니아로서는 유고의 이런 상승세에 다소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동시에 체력과 집중력의 저하를 드러내며 유고의 적극적인 공세에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고는 노장 유고비치, 스토이코비치의 활발한 볼 배분과 드룰로비치의 좌우 측면 돌파, 후반 교체 투입된 밀로세비치의 정확한 위치 선정이 빛을 발하면서 21분과 28분 단 7분 사이 3골을 만회하는 무서운 저력을 보여준다.

슬로베니아는 후반 막판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번 반전을 노리며 몇 차례 찬스를 맞이하기도 하지만 후반 중반까지 활발히 활약했던 카리치와 파블린 등과 교체해서 들어온 아시모비치, 파블로비치, 오스테리치 등의 활약이 기대에 못 미치면서 결국 아쉬운 무승부에 만족하고야 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유고와 슬로베니아의 경기는 축구 경기에서 기술과 체력에 앞서 정신적인 요인이 얼마나 중요한 승리의 관건인가 하는 것을 아주 극명히 시사해준 경기라 할 수 있다.

후반 중반까지 놀라운 조직력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승리 문턱까지 갔던 슬로베니아가 한순간 동점을 허용하며 무너진 데는 체력과 기술의 문제를 거론하기에 앞서 막판 뒷심부족이라 할 수 있는 집중력 와해의 문제를 들 수 있다.

또한 뒤집어 숫적 열세의 위기 상황에서 터져 나온 유고 선수들의 경기에 대한 의지와 자신감 또한 높이살 수 있었던 경기였다.

모쪼록 유럽 축구의 변방 격인 포르투갈, 노르웨이, 슬로베니아 등의 선전은 보는 이들에게 축구가 가져다줄 수 있는 최고의 감동을 선사해 주고 있음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