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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직은 인사동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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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토요일 오후 약속장소에서 만난 우리. 점심 먹어야지-뭐 먹을까?-아무거나. 이리저리 헤매다가 결국 또 대충 때웠다. 겨우 배나 채운 우리. 뭐 하지?-영화나 보자-그럴까? 미어터지는 극장 앞에서 겨우 암표 구해 한편 봤지. 차 마시러 가자-그래. 아메리칸 커피 리필까지 해서 두잔 세잔 마시면서 농담 따먹기. 배고프다 저녁먹자-그래-뭐 먹을까?... 잘 가. 전화할께.

언제까지 이런 데이트를 계속 하시렵니까? 저희 엔존에서는 네티즌들의 후회없는 주말데이트를 위해 "지영은 기자와 함께 하는 주말데이트"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인터넷이다 신문잡지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정작 그대로 따라가기에는 너무 벅찬 게 사실입니다. 엔존의 데이트는 평범합니다. 그렇지만 알짜배기입니다. 만날 곳·먹을 것·하고 놀 것 모두를 패키지로 알려드립니다. 시간표까지 짜드리는 걸요. 매주 금요일 오전중에 업데이트 되는 금주의 데이트 코스, 빨리 빨리 Ctrl+P(인쇄)누르세요!!!

〈그래도 아직은 인사동이다〉

12:00 ~ 12:45 창덕궁에서 느끼는 도심속 평화

뉴욕에 센트럴 파크가 있고 런던엔 하이드 파크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네개나 되는 왕궁과 종묘·운현궁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것이 창덕궁이다. 토요일 정오. 창덕궁 앞에서 만나자. 초여름 더위는 참을만 하고 창덕궁은 더할 나위없이 푸르다. 고궁을 찾았던 게 얼마만인가. 왠지 우리가 애국자라도 된 기분이다.

입장료는 25세를 기준으로 이상은 2,200원, 미만은 1,100원이다. 이런 분류는 어떤 근거에서 생겨난 건지는 모르겠다. 25세 이상들은 돈을 좀 만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선가? 주의할 것은 창덕궁은 입장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거다.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단체관람을 하는 것이 원칙으로 돼 있다. 매시 15분과 45분에만 입장이 된다. 간혹 매시 30분에 15분·45분의 원칙을 어지럽히며 입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 외국인이다. 외국어로 설명하는 시간은 따로 정해져 있다. 이때는 내국인 입장 불가.

12시 약속이지만 그녀/그는 오늘도 10분쯤 늦는다. 입장 시간 12시 15분은 너무 적절한 타이밍이지. 자 15분에서 45분까지 30분동안 창덕궁을 즐기자. 도심 한복판의 자연치고는 너무 근사하고 평화롭다. 부용지도 낙선재도 우리를 반긴다.

13:00 ~ 13:50 이런 칼국수 처음이예요. 찬양집

창덕궁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LG주유소옆길을 따라 종로3가 단성사쪽으로 걷자. 걷다 보면 종로3가 전철역이 나오는 꽤 큰 네거리를 만난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종로3가 5호선 출구 앞에 있는 미진 카센터를 찾을 때까지 다시 걷자. 카센터를 발견하면 오른편 아주 좁은 골목으로 고개를 돌리라. 바로 오늘의 행복한 점심식사를 위한 곳, 찬양집이 나온다. 창덕궁에서 10분 정도 소요.

최고의 국물과 풍부한 해산물을 자랑하는 30년 전통 칼국수를 먹자. 비록 잘 돌아가지도 않는 에어컨이 소리만 요란한 집이지만 칼국수맛 하나로 만사 오케이. 이열치열 정신으로 먹다보면 어느새 한그릇 뚝딱이다. 30년동안 칼국수 하나만 만들어온 집이라 그 맛이 정말 남다르다. 가격은 3천원.

14:10 ~ 17:00 허리우드 극장에서 만나는 헐리우드 액션 대작

더 얘기할 필요도 없이 알려진 올여름 블록버스터 . 찬양집에서 3분 거리에 있는 허리우드 극장은 오랫동안 전통적인 1개관을 고집하다가 밀려오는 멀티플렉스의 도전을 이겨내지 못하고 몇년전 대대적인 공사를 거쳐 3개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블루·레드·그린 세개 관에서 각각 〈미션 임파서블2〉 〈배틀필드〉를 상영한다. 물론 이 기사를 보고 있는 당신이 토요일에 개봉하는 〈미션 임파서블2〉에 마음이 갈 지도 모르지만 상영시간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그런 소수 의견은 조금 무시하고 넘어간다 ^^;. (참고로 〈MI2〉는 3시 50분에 상영을 한다. 조금 더 변명을 덧붙이자면, 〈MI2〉는 개봉 첫날이므로 잘못하면 밟혀 죽을 지도 모른다. 안전을 위해 추천하는 영화를 보자.)

여름 토요일 오후에 블록버스터를 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예매는 필수다. 인터넷 영화예매 사이트에 가서 예매를 하고 가자. 예매해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예매 좌석이 현매 좌석보다 위치도 훨씬 좋다. 점심식사를 여유있게 하고 매표소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조금 가여워 하면서 의기양양 극장으로 들어가자.

15:10 ~ 18:30 인사동답지 않은 인사동에서 맛보는 환상의 된장비빔밥과 간장 게장(혹은 파스타)

세시간 가까이 로마제국의 영웅담에 취해있다보면 출출해지기 마련. 점심으로 먹은 칼국수도 이미 꺼진지 오래다. 이제 인사동으로 가자.

인사동. 가로수마다 걸려있는 전시 안내 현수막들이 우리를 유혹하지만 미술관 탐험은 다음으로 미루자. 인사동은 사진에서 보다시피 온통 공사판이고 대형 건물까지 짓고 있어서 정신이 없다. 최고의 데이트를 원하는 당신이 공사판 한구석에 나있는 조그만 비포장 도로로 그녀/그를 안내할 것인가? 손잡고 다정하게 나란히 걷기는 커녕, 앞뒤 한줄로 걷기도 벅차다. 그럴 수는 없다. 도시가스 공사·건물신축 등 너절한 이런저런 건설현장들이 다 마무리돼서 예전의 고즈넉한 인사동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그를 다시 한번 모시자.

다시 본론으로 들어와서 인사동에는 환상의 된장비빔밥을 자처하는 곳이 몇군데 있다. 그중에 최고라고 할 만한 (사실 자신은 없지만) 툇마루집을 찾자. 허리우드 극장에서 인사동으로 들어서서 우측에 동신당필방이 보일 때까지 걷는다. 동신당필방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서면 툇마루집의 간판이 커다랗게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미련하게 된장예술만 고집한다'는 선전용 플래카드가 이따만하게 걸려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그만큼 자기네 된장에는 자신있는 곳. 된장에 버금가는 최고의 메뉴는 간장게장이다. 메뉴판을 보면 간장게장 옆에는 '시가'라고 도도하게 적혀 있다. (기자의 한 선배는 이 문구에 기가 죽어서 시킬 엄두도 못냈다고 한다.)그렇지만 기죽지 말자. 시가는 팔천원이다. 4천5백원짜리 된장비빔밥과 8천원짜리 간장게장으로 우리는 최고 미식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당신이나 그녀/그가 대식가가 아니라면 된장 1인분과 게장 1인분으로도 충분하다.

인사동에 와서까지 파스타를 고집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만약 있다면 "여기는 청담동이 아니고 인사동입니다"라고 한마디 해준 다음 씩씩대며 뽐모도로로 안내하자. 광화문에서 시작된 이 집은 종각·강남역·명동 등에도 분점이 있고 인사동도 그 분점들 중의 하나다. 흔히 많이 알려진 집은 맛이 별로일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곳은 맛도 충실하다. 새우크림소스 스파게티를 선택한다면 일단은 성공.

18:40 ~ 19:30 앗! 이곳에도 전통찻집이! 운현궁 전통다실에서 맛보는 옛 풍류

인사동의 현수막을 뒤로 하는 것이 못내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단호하게 안국역쪽으로 발길을 돌리자. 낙원상가 아랫길을 빠져나와 안국역쪽으로 50미터만 걸으면 흥선 대원군의 궁궐, 운현궁이 나온다. 입장료는 700원. 창덕궁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싸다.

서울에 살면서 타워레코드 모르는 사람은 없어도 운현궁 모르는 사람은 태반이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가례(嘉禮)가 있었던 이곳 역시 우리 건축물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이다. 예전에는 그 규모도 지금의 일본문화원과 삼환빌딩에 이를 만큼 컸다고 하지만 지금의 운현궁은 왠지 초라하고 쓸쓸하다. 그럼 기자의 개인적인 감상은 여기서 접고 다시 데이트를 즐기자.

운현궁 안의 이노당 건물에는 전통다실이 있다. 차를 마시려는 목적이 아닌 일반 관람객은 입장이 거절되는 것이 좀 괘씸하지만 옛 흥취 가득한 건축물에서 전통차 한잔을 하려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보고도 남는다. 작설차·솔잎차와 요즘 유행하는 매실차는 물론 시원한 식혜와 수정과도 있다. 30분동안 지난 여섯시간의 피로를 조금 씻어내면서 그녀/그와 은밀한 얘기 몇마디를 나누자.

20:00 ~ 22:00 판소리에서 올드팝까지. 토요일밤의 하일라이트, 운현궁의 향연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로 오후의 허기를 채웠다면 밤의 메인 디쉬는 우리 문화다.

저녁 일곱시가 넘으면 전통다실이 슬슬 문을 닫는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운현궁 안을 거닐다가 야외특설무대로 발길을 옮기자. '운현궁의 향연'이라는 볼거리가 2시간동안 펼쳐진다. 제1부에는 상모놀이와 각종 북으로 연주하는 코리아환타지 공연, 판소리 '심청가'와 가야금 병창 등이 이어지고 제2부에서는 자연과 어우러지는 재즈댄스와 올드팝송을 감상할 수 있다. 두시간동안 공연을 감상하는 데는 얼마일까? 놀랍게도 공짜다. 기쁘지 않은가?

이중에서도 'Dancing 푸너리' 순서에 주목하자. 꽹과리 4개의 합주곡인 푸너리는 록음악의 16비트와 비슷한 동해안의 무속가락이다. 연주자들이 무대에만 머무르지 않고 객석 속으로 파고드는 푸너리 공연을 보다보면 우리 가락은 역시 보거나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직접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2부의 올드팝송 순서에서는 블루스 음악을 주로 소개한다. 블루스 특유의 5음계인 '블루노트'는 한국 전통음계인 '궁상각치우'와 흡사하다고들 한다. 우리 정서와 블루스의 만남도 한번 지켜볼 만 하다.

22:10 ~ 기자는 알 수 없는 시각.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자 이제 오늘의 공식 데이트 코스는 여기서 접는다. 오늘 당신은 어땠는지? 경제관념에 투철한 기자가 제공하는 오늘의 정산. 소요경비는 창덕궁 입장료 4,400원 + 찬양집 칼국수 6,000원 + 〈글래디에이터〉12,000원 + 된장비빔밥과 간장게장에 12,500원 + 운현궁 입장료 1,400원 + 전통차 두잔 6,000원 = 약 42,300원.

이제 다시 발길을 돌려서 인사동의 '싸립문을 열고 들어서니'나 '깔아놓은 멍석, 놀다간들 어떠하리'에서 파전을 안주삼아 솔잎주로 목을 적셔도 좋다. 아쉬움을 달래며 집으로 향해도 좋고. 무얼 하든, 기자의 낮보다 아름다운 당신들의 밤을 위하여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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