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부채 삭감+은행 구제금융’ 패키지딜 가시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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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호 20면

20일(현지시간) 그리스 수도 아테네의 중심가인 신타그마 광장에 모인 시위대들이 국기를 흔들며 정부의 재정 삭감안에 항의하고 있다. [아테네 AP=연합뉴스]

유로존 재무장관들은 21일 지난해 5월 그리스에 주기로 결정했던 구제금융 1100억 유로 가운데 6차 집행분인 80억 유로를 지원한다고 밝혔다. 이 돈은 이달 초 집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 그리스 상황이 발목을 잡았다. 유럽연합·유럽중앙은행(ECB)·국제통화기금(IMF) 등 이른바 ‘트로이카’는 지난달 실사 과정에서 그리스 정부의 긴축안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그리스 국민은 정부의 긴축안에 반대해 격렬한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다음달 중 그리스가 보유한 현금이 바닥나 채무불이행(디폴트) 선언이 나올 판이었다. 이번 지원금은 다음달 중순 집행된다. 긴급 수혈로 일단 그리스의 숨통이 트였다.

23, 26일 잇따라 정상회담 … EU의 안간힘

그렇지만 근본적인 대응책은 아직 논의를 시작하지도 못했다. 민간 채권단이 얼마나 손실(헤어컷)을 감당할 것인지, 부실해진 은행은 어떻게 구제할 것인지가 논의의 핵심이다. 첫걸음은 그리스 지원 방안이다. 더 구체적으로 민간 채권단이 갖고 있는 그리스 채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EU 정상들은 올 7월 그리스에 1590억 유로를 지원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2차 구제안에 합의했다. 당시 민간이 보유한 그리스 채권은 액면가가 같은 30년 만기의 우량채권으로 바꿔주기로 했다. 현재 가치로 할인하면 대략 21%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그리스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면서 이제는 더 많은 손실이 불가피해졌다. 로이터를 비롯한 외신들은 트로이카의 그리스 실사 보고서를 잘 아는 익명의 관계자를 인용해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150%가 넘는 그리스의 부채비율을 120% 아래로 낮추려면 민간 채권단이 부채 원금을 50% 깎아줘야 한다”고 보도했다.

헤어컷 비율이 높아질수록 은행은 부실해진다. 3년 전 리먼 사태처럼 불안해진 투자자들이 돈을 빼내면서 금융 공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현재 4400억 유로 규모인 EFSF를 1조 유로 이상으로 늘리고, 은행의 자본도 확충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이번 EU 정상회담에서는 은행의 자기자본 비율을 내년 7월까지 9%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정상들은 이 가이드라인에 따라 은행들이 우선 시장을 통해 자본을 확충하고, 실패하면 정부가 은행을 지원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

문제는 프랑스다. BNP파리바를 비롯한 프랑스 은행들이 갖고 있는 그리스 채권이 많기 때문이다. 자기자본비율을 9%에 맞추는 데도 9개월 이상이 필요하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ECB가 발권력을 동원해 EFSF 규모를 늘리고 이를 활용해 은행자본을 확충하자”고 말했다. ECB가 은행에 저리로 EFSF 자금을 빌려주거나, 최소한 지금까지처럼 민간 채권단이 갖고 있는 그리스 채권을 사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독일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의 생각은 다르다. 메르켈 총리는 “각국 정부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ECB를 이용하는 것은 EU 조약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ECB를 활용할 수 없다면 프랑스 정부가 나서서 은행을 지원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국가 신용등급 강등이 기다리고 있다. 국가 부채가 GDP의 90%에 육박하는 상황이라 재정적인 여유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무디스는 17일 “프랑스 정부가 금융권 지원에 자금을 투입할 경우 재정 부담이 크게 늘어나게 된다”며 프랑스 국가 신용등급 전망을 앞으로 3개월 이내에 ‘부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경고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도 21일 “경기가 악화하면 프랑스의 국가신용등급을 강등할 수 있다”고 밝혔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대선을 6개월 앞두고 지지율이 야당인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에 크게 뒤처져 있는 사르코지 대통령이 가만 있으면 은행이 쓰러지고, 움직이면 국가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금융시장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대타협’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정상회담을 두 차례로 늘린 것은 구체적인 합의안을 도출하기 위해서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들에게 남은 시간은 별로 없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공은 다음달 3일부터 프랑스 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로 넘어간다.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까지 모이면 계산은 더 복잡해진다. 신흥국은 “IMF를 통해 유럽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미국도 “유럽이 돈을 더 써야 한다”는 입장이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20일 “유로존 정상들이 유로 안정화와 시장 신뢰 회복을 위한 정치적인 의지를 밝혀야 한다”고 압박했다.

20일 독일과 프랑스는 공동성명서를 통해 “최소한 26일까지는 각국 정상들이 완벽하게 합의된 포괄적 대책을 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앙겔라 총리와 사르코지 대통령은 22일 브뤼셀에서 만나 사전 조율을 했다. 포괄적 대책은 그리스 구제금융 지원과 이를 위한 EFSF 추가 확대, 그리고 부실해진 은행의 자본 확충 방안을 포함한 ‘트로이카 세트’가 돼야 한다.

로크웰글로벌의 피터 카르딜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정상회담 결과가 모든 병을 치유하지는 못하겠지만 옳은 방향으로 가는 계단에 접어들었다는 신호를 시장에 줄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FT는 그리스 국채에 대한 헤어컷 비율을 높일 것으로 예상했다. EFSF가 손실을 떠안는 프랑스안과 디폴트 선언 뒤 절반을 탕감하는 독일안 사이에서 타협이 이뤄져 기존 채권을 대신할 우량채권의 이자율과 만기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민간 채권단이 부담할 손실을 최고 50%까지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헤어컷 비율이 높아질 경우 은행의 자본을 확충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2000억 유로로 추산된다. 정상회담에서는 800억~1000억 유로 규모의 자본 확충 방안이 나올 전망이다. 각국은 소형 부실은행을 정리하거나, 부실자산을 묶어 처리하는 기관을 세우는 등의 방법을 동원해 자본시장이 정상화될 때까지 시간을 벌 것으로 예상된다. EFSF의 확대는 쉽게 결론이 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로이터는 독일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정상회의에서 EFSF 재원 확충에 대한 견해차를 좁히지 못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프랑스는 1조 유로 이상으로 확대하기를 원하지만 ECB를 통한 자금 조달은 어려운 상황이다. IMF를 통해 중국이나 브라질에서 차입하는 것은 지난주 열린 G20 재무장관 회담에서 부결됐다. FT는 EU 관계자를 인용해 “EFSF가 그리스·이탈리아·스페인 등의 채권을 직접 사들이는 대신 채권자가 입게 될 손실의 10~20%를 보상해주는 ‘간접 보증’ 방식으로 돈을 더 풀지 않고 실제 지원 규모를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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