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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광화문 ‘빅판’ 남대문 ‘벤치 맨’ … 두 사람 거리 어떻게 좁힐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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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어제 아침에도 ‘벤치 맨’은 어김없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는 경기도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 서소문 직장으로 출근한다. 남대문, 정확히는 삼성생명 본사 앞 정류장에서 내린다. 검정 바지에 검정 운동화, 진회색(때가 끼어 더 진해졌다) 점퍼를 입은 사나이가 늘 벤치에 외롭게 앉아 있다. 퇴근길에도 마찬가지다. 그의 옆자리는 항상 비어 있다. 버스 이용객들은 사나이를 피해 근처 다른 벤치에 피곤한 엉덩이를 맡긴다. 그는 콧수염을 길렀고 담배를 피우며, 왼쪽 다리를 떠는 버릇이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모습은 적어도 지난 1년 사이에는 목격하지 못했다. 가끔 혼자 웃거나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러 지나가던 여성들이 흠칫 놀라는 광경을 본 적은 있지만.

 남대문에서 한 정류장 거리에 있는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는 지난해 7월 창간된 잡지 ‘빅 이슈(The Big Issue)’ 한국판을 파는 노숙인이 있다. 영국에서 시작된 노숙인 자활을 돕는 사회적 기업에서 만드는 잡지다. ‘빅 이슈’ 판매원을 줄여 ‘빅판’이라 부른다. 빅판들의 판매 활동을 돕는 자원봉사자는 ‘빅돔’, 단체 자원봉사는 ‘떼돔’이다. 빅판들의 물품을 보관해주고 비가 오거나 추우면 잠시 몸을 피하게 해주는 가게는 ‘빅숍’이다.

 ‘빅 이슈’ 판매원에게는 규칙이 있다. 술 마시면 안 되고 시민 통행을 방해해도 안 된다. 빨간 조끼 유니폼을 입고 지정된 장소에서 팔아야 한다. ‘미소 지으며 당당히 고개를 든다’는 규칙도 있다. 나는 얼마 전 레이디 가가가 표지에 나온 ‘빅 이슈’(9월 15일자)를 샀다. 그저께 산 10월 1일자 표지인물은 안성기였다. 기고·인터뷰·사진을 뜻있는 이들의 재능기부에 의존하는 ‘빅 이슈’는 내용도 좋고 살 때 기분은 더 좋다. 1부당 3000원 중 1600원이 빅판 몫으로 돌아간다. 빅판이 되려는 노숙인은 일정한 교육을 받은 뒤 10부를 무료로 얻는다. 다 팔면 자기 몫 1만6000원이 떨어진다. 이걸 종잣돈 삼아 판매를 이어간다. 잘만 버티면 노숙인들의 첫 꿈인 고시원 입주 등 자립 기반을 다지게 된다. 대개 첫 2주일에 빅판을 계속 하느냐 노숙으로 돌아가느냐 고비가 찾아온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남대문 벤치 맨과 광화문 빅판 중간의 덕수궁 돌담길에는 ‘망치 맨’도 있다. 어린 시절 오른팔을 잃은 조규현(51)씨가 불편한 팔로 나무판에 가훈·명언을 새겨 팔아 생계를 잇고 있다. 벌써 17년째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 망치 맨, 빅판, 벤치 맨은 다 같은 사회적 약자지만 처지나 하루 일과는 차이가 크다. 개인적 책임으로만 돌릴 문제가 아닌 듯하다. 벤치 맨과 빅판 사이의 거리가 아직은 너무 멀다. 정책이든 시민사회든 더 많은 이들이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나서야 할 것 같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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