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활용하라 … 신동빈, 계열사 사장에 공격 경영 주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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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롯데그룹이 다시 국내외 인수합병(M&A)시장의 큰손으로 나설까.

글로벌 경제위기로 국제 M&A 시장이 뜨거워지고 있는 가운데 신동빈(56) 롯데그룹 회장이 적극적 M&A 검토 필요성을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롯데그룹 관계자들에 따르면 신 회장은 최근 주요 계열사 사장들과의 만남이나 그룹 정책본부 임원회의 등에서 “지금처럼 경기가 좋지 않을 때가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며 “싼값에 매물로 나온 우량 기업들에 대한 M&A를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 것으로 확인됐다.

실제 경제위기 때야말로 M&A의 적기다.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고 원자재가가 오르는 등 경영 여건이 나빠지면 우량 기업들이 싼값에 매물로 나오기 때문이다.

신 회장의 ‘M&A 본색’은 이미 2008년 금융위기 때 빛났다. 롯데는 그해 10월 3900억원을 들여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계 대형마트인 마크로 점포 19개를 인수했다. 세계적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국제 금융시장이 일시에 얼어붙은 지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외부의 우려 속에 인수한 마크로 점포는 이후 롯데마트 해외 진출에 효자가 됐다. 인도네시아의 마크로 점포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은 롯데마트가 중국 시장에서 공격적으로 점포를 늘려가는 데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롯데는 2009년 1월 5030억원을 투자해 소주 ‘처음처럼’을 만드는 두산주류BG(현 롯데주류)를 샀다. 롯데는 일약 진로와 소주시장 1, 2위를 다투는 주류업체를 갖게 됐다. 2008~2009년 성사된 롯데의 M&A 건수는 11건에 이른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잠잠해진 이후 롯데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M&A를 진행했다. 2010년 2월 GS리테일의 마트와 백화점 부문을 1조3000억원에 인수하더니 그해 7월엔 말레이시아 석유화학기업 타이탄을 1조5000억원에 사들였다. 당시 M&A로 롯데 계열사인 호남석유화학은 국내 1위, 아시아 2위의 에틸렌 생산업체로 도약했다. 국내에서 벌어진 초대형 M&A전에도 가세했다. 대우인터내셔널 입찰에는 3조원 이상을 써 내며 의욕을 보였고, 한때는 대한통운 인수에도 강한 관심을 보였다.

 세계적 경제위기가 M&A의 ‘호기’인 것은 매물이 많아서기도 하지만 시장에 돈이 말라붙어 현금을 쥐고 있는 이들이 드물어서다. 신 회장의 M&A 본색이 높게 평가받는 건 이 대목과도 맞닿아 있다. 위기가 덮치기 전 한발 앞서 자금을 확보해두는 선제적 금융 전략 때문이다. 2008년 일이다. 그해 리먼이 파산한 것은 9월 14일. 호텔롯데는 22일 110억 엔(당시 환율로 약 1204억원)어치의 엔화 표시 채권을 발행했다. 롯데제과(110억 엔)와 호남석유화학(210억 엔)도 외화 자금을 조달했다. 이런 자금이 모두 금융위기 때 ‘방패’와 ‘창’이 됐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롯데는 그리스 재정위기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기 전인 올 6월 약 1조원(달러화 표시 5억 달러+엔화 표시 325억 엔)의 자금 조달에 성공했다. “그리스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니 미리 좋은 조건에 자금을 확보해둬야 한다”는 신 회장의 판단 덕분이었다. 올 6월 말 기준 롯데그룹의 현금성 자산은 5조원 이상이다. 필요하면 당장이라도 M&A에 쓸 수 있는 실탄이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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