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호랑이를 17년 좇았다, 눈매마저 호랑이 닮은 박수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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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용 전 EBS PD는 “내 자신이 생물학자 같기도 하고, 땅굴 속에서 호랑이를 기다릴 때는 스파이가 된 기분도 든다”고 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박수용 지음, 김영사
436쪽, 1만6000원

경남 거창에 한 소년이 있었다. 밥을 먹는 것처럼 소를 몰았다. 소를 몰고 산을 넘어 5일장을 찾았다. 공동묘지를 지나고 이 산 저 산을 넘다 보면 나무가 새가 말을 걸어왔다. 소장수였던 아비의 고집에 학교를 빼먹기 일쑤였다.

 어느 날에는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왔다. 아버지 몰래 입학한 고등학교였다. “소를 몰아야지.” “공부를 시켜야 합니다.” 아버지와 선생님의 싸움은 1주일에 4일은 학교에 나오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고삐를 놓은 손은 펜을 잡았다. 그토록 그리던 대학에 진학한 청년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서울대 영문과 동기들이 셰익스피어를 볼 때, 그에겐 소로의 『월든』이 성경처럼 다가왔다. 시베리아 호랑이를 찍은 다큐멘터리로 ‘프랑스 쥘 베른 영화제 관객상’(2006)을 ‘블라디보스토크 국제 영화제 특별상 AMBA’(2010) 등을 수상한 박수용(47) 전 EBS PD의 어린시절 이야기다.

 20년간 자연 다큐멘터리만을 고집해온 그는 1995년부터 시베리아호랑이를 좇기 시작해 총 7편의 다큐멘터리를 발표했다. 이전에는 세계에서 단 1시간도 영상으로 기록돼 있지 않았던 시베리아호랑이다. 그간 영국의 BBC, 미국의 내셔널지오그래픽 등이 수차례 시도했지만 무선전파발신기를 단 호랑이 외에는 찍지 못했다.

 그가 첫 책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을 냈다. ‘시베리아 호랑이-3代의 죽음(2003)’에서 다루지 못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15일 서울 순화동에서 그를 만났다. 호랑이를 닮은 듯한 눈매에 소복한 웃음이 얹힌 영락없는 산사내였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찍게 된 계기는.

 "어렸을 적 소를 몰며 나도 모르게 자연친화적인 품성이 생겼다. 아주 자연스럽게 방송국에 입사하자마자 ‘자연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해 지금까지 그 길만 걸었다. 아버지를 참 많이 원망했는데 돌이켜보면 고맙다.”

 -왜 호랑이인가.

 "처음에는 곤충이나 식물처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부터 했다. 그러다 점점 어려운 작업에 도전하고 싶어졌다. 90년대 중반, 열대지방 호랑이를 찍은 영상은 넘쳐났지만 시베리아·연해주·만주·한반도 등에 사는 시베리아호랑이를 찍은 영상은 3분짜리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예산도 못 받아 내 돈을 들여가며 제작했다. 나중에는 멸종 위기에 몰린 시베리아호랑이의 실태를 알리고 싶어 집요하게 연구하고 공부했다.”

 박 PD는 호랑이를 영상에 담기 위해 1년에 열 달을 시베리아·연해주 등지에서 보냈다. 절반은 호랑이의 자취를 좇으며 생태지도를 만들고, 나머지 절반은 땅굴 속에서 호랑이를 끝없이 기다리는 잠복을 했다.

 -굳이 ‘잠복근무’하는 이유는.

 "미국인들은 무선전파발신기를 달아 책상에서 연구한다. 그런 호랑이의 모습을 편하게 찍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발신기를 달기 위해 호랑이를 생포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호랑이가 죽는다. 그런 일은 막아야 한다. 자연은 연출이 아니라 관찰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비탈에 선 나무’와 같은 자세여야 한다고 믿는다.”

 -책을 낼 결심한 이유는.

 “영상만 보면 호랑이를 찍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지 않은가. 내 인생과 내가 만난 사람과 자연을 하나로 묶어 긴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지난해 EBS를 퇴사하고 ‘네이처21’을 설립했다. 계획이라면.

 "글·음악·영상을 망라하는 콘텐트를 보여주고 싶다. 장르를 불문하고 현대인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이 죽어야만 슬픔을 느낀다. 먹고 살기 힘드니까 그렇다. 그런데 나는 수리부엉이 한 마리가 죽는 걸 봐도 눈물이 난다. 그런 느낌을 전달해주고 싶다.”

[서평] 영민한 호랑이, 집요한 사내의 ‘사랑 일지’

전세계에 350여 마리만 남아있는 시베리아호랑이.

“바스락바스락 눈 밟는 소리와 함께 너구리 가족이 사라지자 수리부엉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저녁식사는 했냐고, 여전히 사랑한다고, 보채듯 앙탈부리듯 주고받는 부엉이 소리가 텅 빈 분지를 고즈넉하게 채운다.”

 20년 가까이 호랑이를 좇은 거친 사내의 감성이 이토록 여리다.

 책의 주인공은 사냥할 때 주변을 온통 피투성이로 만든다고 해서 ‘블러디 메리(16세기 영국 여왕의 별명)’라 불리는 암호랑이와 가족들이지만, 호랑이 이야기만 담긴 것은 아니다. 갈수록 극성인 밀렵꾼에 늘 위협당하는 모든 야생동물에 대한 애틋한 관찰과 기록이 꼼꼼히 실렸다. 시베리아호랑이의 습성과 생태를 낱낱이 살핀 부분에서는 생물학자의 면모가 보이고 “호랑이를 기다리는 일은 자신을 기다리는 일이다”할 때는 철학자가 보인다.

 백미는 쥐가 돌아다니고, 영하 30도에 이르는 추위를 견뎌내야 하는 땅굴 속에서 호랑이를 기다리며 겪은 일들이다. “콧김과 함께 그녀의 뻣뻣한 수염이 왼쪽 손등을 스쳤다”는 섬뜩한 경험도 있지만 웃을 일도 있다.

 어느 날은 땅굴 속 읽을거리가 동나자, 녹차통을 읽었다. 포장재질에 ‘SC마닐라’라고 쓰인 것을 보고 “신선한 정보도 있다”며 재미있다 여겼단다.

 신간은 제법 두껍다. 화려한 포장도 없어 쉽게 집어들 만한 책이 아니다. 하지만 일단 펼쳐 들면 빠져들 수밖에 없다. 자연과 생명의 신비, 호랑이의 영민함, 그리고 한 인간의 집요한 탐험에 읽는 내내 가슴이 뛴다. 『시튼 동물기』를 뛰어넘는 감동과 『월든』에 맞닿아있는 사색이 함께 담겼다.

글=임주리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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