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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사환하며 한걸음씩 문학의 길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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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호 09면

1980년 무렵의 박재삼 시인. [중앙포토]

1983년 가을 무렵 ‘문예중앙’ 화보 촬영을 위해 박재삼 시인과 함께 경남 삼천포를 찾은 일이 있었다. 그때 삼천포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그의 눈빛이 추억이나 그리움 혹은 한(恨) 따위의 여러 가지 색깔로 얼룩지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박재삼에 있어서 삼천포라는 곳이 어떤 의미인가를 일깨워주고 있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26>박재삼, 가난과 병고 속에 꽃피운 시의 미학

본래 그가 태어난 곳은 일본이었다. 그의 부모는 일제 치하 이 땅에서 살기가 너무 힘들어 도쿄로 건너가 날품팔이를 하며 1933년 박재삼을 낳았다. 하지만 살기 어렵기는 일본도 마찬가지여서 이들은 박재삼이 서너 살 때 어머니의 고향인 삼천포로 되돌아왔다. 아버지는 지게 품팔이로, 어머니는 생선 행상으로 나서 근근이 먹고살았으나 좀처럼 밑바닥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박재삼이 어렸을 적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하고 고혈압·위궤양 등으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난 것도 성장기에 헐벗고 굶주리며 힘겹게 살았던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가난은 중학교에도 진학을 못할 정도였다. 진학을 포기하고 삼천포여자중학교의 사환으로 들어간 박재삼은 그곳에서 교사로 일하던 시조시인 김상옥을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이 그를 시의 길로 이끌었다. 2년 뒤 삼천포중학교 야간부를 수석 입학한 박재삼은 제1회 개천예술제에서 시조 ‘촉석루’로 차상에 올라 일찍부터 시적 재능을 떨쳤다. 삼천포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53년 수석으로 졸업하고 같은 해 모윤숙의 추천으로 ‘문예’ 11월호에 시조 ‘강물에서’를 발표했다. 이듬해 서울로 올라와 고려대 국문학과에 입학한 박재삼은 김상옥의 주선으로 ‘현대문학’ 편집사원으로 입사하고, 55년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섭리’ ‘정적’ 등을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시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 무렵 나와의 작은 인연도 있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해였던 것 같다. 삼천포여고 교장이던 정헌주가 국회의원에 당선하면서 이사한 곳이 서울 종로구 가회동의 내 집과 맞붙은 뒷집이었다. 정헌주는 교장 시절부터 사환 일을 하던 박재삼의 재능과 사람됨을 눈여겨봤던 듯 상경하여 거처가 마땅치 않았던 박재삼을 1년 가까이 자신의 집에 기거토록 했다. 예닐곱 살 안팎이던 두 아들을 돌봐주게 하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정헌주의 큰딸과 경기여고 동급생이던 허영자 시인이 정헌주의 집에 드나들면서 박재삼을 처음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형이 없는 내가 큰형처럼 따랐음에도 그때의 그 ‘허름한 시골청년’이 박재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70년대 초 내가 문학기자를 처음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이런 기억도 있다. 내가 대학 2학년이던 61년 3월 이양하 교수의 ‘영시 개론’ 첫 시간이었다. 강의실에 들어선 이 교수가 아무 말 없이 칠판에 시 한 편을 빼곡하게 적었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59년 발표된 박재삼의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이었다. 다 적고 나서 이 교수는 “여러분은 영시를 배우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지만 한국시의 진수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영시를 배워 뭐하겠느냐”고 말했다. 이 시는 ‘한국과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잘 나타낸 시’라며 그 느낌을 적어 다음 시간에 제출하라는 것이 첫 숙제였다. ‘신록예찬’ 등 주옥 같은 글을 쓴 수필가로도 유명하고 당대 최고의 영문학자였던 이 교수가 20대 중반 시인의 작품에 그런 찬사를 던진 것이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60년대 접어들면서 박재삼은 시단의 유망주로 떠오르고 있었다. 61년 성찬경, 박희진, 박성룡, 구자운, 강위석, 문덕수 등 동년배의 촉망되는 시인들과 ‘60년대 사화집’을 펴낸 박재삼은 이듬해 첫 시집 ‘춘향이 마음’을 내놓으면서 시단에 자신의 위치를 굳건하게 구축했다. 60년대 중반 결혼하여 슬하에 남매를 둔 박재삼은 대한일보 기자로 들어가게 되면서 그때까지의 가난에서 벗어나는 듯싶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고혈압에 시달리면서도 술·담배 등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천성적 시인 기질이 문제였다. 그는 67년 소설가 남정현의 ‘분지’ 사건 공판을 방청하고 나오던 중 처음 쓰러졌다. 아직 젊은 나이여서 얼마간 치료를 받은 후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됐지만 69년 설 전날 대한일보 숙직실에서 쓰러진 것은 적신호였다. 여러 달 병원 신세를 진 뒤 다시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그래도 그의 술·담배 습관은 여전했다.

70년대 들어서면서 박재삼은 대한일보도 그만두고 시 쓰는 일에만 매달렸다. 그의 거의 유일한 수입원은 여러 신문·잡지에 쓰는 기보(棋譜) 해설이었다. 바둑 실력은 보잘것없었으나 시인이 쓰는 기보여선지 감칠맛이 있었고, 그래서 그 고료 수입은 80년대까지도 그들 가족의 최저생활을 유지케 하는 버팀목이었다. 74년 육영수 여사가 흉탄을 맞고 세상을 떠난 뒤 박목월이 떠맡은 ‘육영수 전기’ 집필에 참여한 것도 막연하게나마 그 작업에 뒤따를 반대급부를 염두에 두었을 법하다. 하지만 76년 책이 출간된 후 만났을 때 박재삼은 ‘원고료조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체면만 구겼다’며 허탈해 했다. 그 무렵 문단에서는 ‘육영수 전기’ 일로 박목월과 박재삼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80년대 이후에도 박재삼은 위궤양까지 겹쳐 몇 차례 더 쓰러졌지만 얼마간 앓다가 기적처럼 다시 회복되는 기이한 현상을 되풀이했다. 문인들은 그의 선량하고 낙천적인 기질이 그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매년 한 편꼴로 시집을 내놓았고 한국문학 작가상, 인촌상 등을 수상했다. 95년 백일장 심사 도중 다시 쓰러진 박재삼은 이번에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2년여의 긴 투병 생활 끝에 97년 6월 8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4세였다. 그 이듬해 민음사는 ‘박재삼 시 전집’을 간행했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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