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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 거쳐, 광안리 돌아, 정동진까지 … 신나는 ‘고생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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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동안 전국 다섯 개 지역 돌아다니기.

야심 차게 계획은 짰지만 전라도에서 시작해 경상도를 거쳐 강원도까지 이어지는 일정은 생각보다 빡빡했다. 휴가철과 겹쳐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넘쳐났다. 사실, 그래도 좋았다. 비 맞으며 돌아다녀도 흥이 났고 컵라면 먹고 체했어도 자전거 페달을 밟고 신나게 달렸다. 자청하고 나선 고생이었기 때문이다.

글=홍지연 기자
사진=김성룡·홍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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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년 만의 기차여행을 시작하며

15년.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 게 15년 만이었다. 사실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플랫폼과 기차 사이 틈에 발이 빠질까 봐 엄마 손을 꼭 잡고 기차에 올랐던 일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기차여행이다.

 기차 안은 내일로 여행자로 가득했다. 승객의 3분의 2는 내일로 여행자로 보였다. 열차가 기차역에 진입하자 내일로 여행자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일로 티켓은 지정 좌석제가 아닌 자유석이나 입석이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어도 자리 주인이 나타나면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

 내가 앉은 자리의 주인이 나타났다. 조용히 짐을 챙겨 열차 출입구 통로로 나왔다. 계단에 걸터앉았더니 냉방이 안 돼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고 화장실 냄새가 확 풍겨왔다. 그래, 까짓것. 아무렴 어떤가. 좋게 말해서 낭만과 청춘이 버무려진 여행이지, 따지고 보면 사서 고생 아닌가. 기차는 첫 목적지 순천을 향해 씩씩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마지막 여행지였던 강릉 정동진. 휴가철을 맞은 정동진에는 방문객들로 넘쳐났다. 삼삼오오 모여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모습이 여유롭게 느껴진다.

# 청춘의 광장 광안리 해변에서

이튿날. 아침 6시부터 일정을 시작했다. 순천만까지 가는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버스 안에도 내일로 여행자들이 여럿 있었다. 일찍 서두른 보람이 있었다. 순천만 자연생태공원 입장료 받는 창구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동생 것까지 포함해서 입장료 4000원이 굳었다.

 갈대밭을 가로지르는 데크로드에 들어섰다. 왜 순천만이 한국 생태관광의 수도라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갈대밭을 둘러싸고 있는 갯벌엔 온갖 종류의 갯것이 살고 있었고, 서울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새도 여기서는 흔했다.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순천만에서 나와 부지런히 순천역으로 향했다. 다음 여정은 부산. 꼬박 다섯 시간 기차를 타야 한다.

 순천이 정적인 느낌이었다면, 부산은 역동적이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부산 특유의 휘황찬란하고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좋았다. 밤이 깊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동생과 함께 광안리 해변으로 나갔다. 해변을 따라 테라스가 늘어서 있었다. 동생과 함께 바닷가에서 맥주를 마셨다. 늦은 밤인 데도 해수욕장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외국인도 많았다. 여기가 한국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자유분방한 분위기였다.

 여기서 내일로 여행자 박아연(24)씨를 만났다. 그녀는 “일부러 다음 여행지는 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발길 가는 대로 가보겠다. 이번 여행은 무계획이 계획이다”고 그녀는 당당하게 외쳤다.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일주일만이라도 일상을 잊고 정처 없이 떠돌겠다는 그녀는 진정한 청춘 여행자였다.

# 비 맞으며 찾아간 하회마을

천년고도를 자전거로 돌아보겠다는 야무진 목표를 가지고 경주에 입성했다. 경주역에서 자전거를 빌려 불국사까지 달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급하게 먹은 훈제 계란과 컵라면이 탈을 일으켰다. 페달을 밟을수록 명치가 아파왔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대릉원·첨성대·안압지 등 경주 시내에 있는 유적지만 둘러봤다.

 어릴 적 트라우마를 남긴 천마총 앞에 섰다. 한 수저 크게 떠놓은 커다란 녹차 아이스크림처럼 친근한 모양. 그러나 무덤은 무덤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괜히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어두운 내부는 예나 지금이나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천마총에서 나와 대릉원 주변을 자전거로 한 바퀴 돌았다. 그 사이 소화가 좀 됐는지 통증이 덜했다. 그래도 남은 일정을 생각해, 여정을 접었다.

 경주에서 나와 안동으로 갔다. 안동역에 도착하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비를 사 입고 하회마을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 갔다. 세상에! 내일로 여행자가 버스 정류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입석까지 꽉꽉 채운 버스가 바로 앞에서 매정하게 문을 닫고 출발해 버렸다. 이렇게 된 바에 안동소주나 마셔야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안동 구시장에 가서 안동찜닭을 안주 삼아 동생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안동소주 한 병을 다 마셨다.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하회마을행 46번 버스는 여전히 만원이었다. 겨우 출입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하회마을로 가는 버스 안. 본의 아니게 버스 차장 역할을 맡았다. 뒷문으로 타는 승객의 돈을 대신 받아 요금통에 넣기도 했고, 운전기사 아저씨를 대신해 “다음 버스 5분 뒤에 옵니다”라고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승객들에게 안내를 하기도 했다.

 하회마을에 도착하니까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8000원이나 주고 산 우비는 이내 우비의 기능을 상실했다. 카메라도 비에 젖어 전원이 꺼졌다. 낮에 먹은 안동소주 때문일까,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 때문일까. 하회마을의 고즈넉하고 몽환적인 분위기에 왠지 마음이 끌렸다.

# 젊은 날의 추억은 동해 바다에 묻어두고

여행 마지막 목적지인 정동진. 여행 내내 날씨가 흐렸지만 정동진에서는 모처럼 해가 났다. 역에 비치된 역무원 모자를 쓰고 포즈를 취한 홍 기자(왼쪽)와 동생 승연양.


여름 하면 바다, 바다 하면 동해. 이번 여행의 마무리이자 클라이맥스는 정동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함께 밤기차를 타고 해돋이를 보러 가야지’라고 다짐하고 마음속에 꼭꼭 숨겨두었던 그곳, 정동진.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영화 같은 만남은커녕 기차에서 자리에 앉자마자 곯아 떨어졌다. 얼마나 잤을까. 옆자리 동생이 “바다다!”라고 소리치며 깨웠다.

 정동진역에 내렸다. 6일간 쌓인 여독이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남부지방을 돌아다닐 때 지겹게 쫓아다니던 비도 정동진까지는 따라오지 않았다. 하늘은 맑았고 뜨거운 여름 태양이 작열했다. 배낭을 기차역 보관함에 넣고 해변으로 달려나갔다.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다가 갑자기 밀려든 파도에 중심을 잃었다. 머리끝까지 그대로 물에 빠졌다. 코와 입으로 짠물이 흘러들어왔다. 그래도 웃음은 연방 터져 나왔다. 온갖 잡념이 차디찬 동해 바닷물에 씻겨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 이제 여행을 정리할 시간이다. 참 많이 돌아다녔고, 참 많은 걸 보고 다녔다. 옆자리에서 졸고 있는 동생을 보니 일주일 전보다 얼굴이 훨씬 밝아졌다. 언제 또 이렇게 여행을 할 수 있을까. 내년이면 나도 내일로 티켓 대상자를 졸업한다. 기차 안에서 내 인생의 한 매듭을 짓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 내일로 티켓

내일로 티켓. 한 번 분실하면 재발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코레일(www.korail.com)이 여름과 겨울 방학 시즌 동안 청소년에게 판매하는 특별상품. 만 25세 이하 청소년만 구입할 수 있다. 내일로 티켓 1장이면 새마을호·누리로·무궁화호·통근열차의 자유석과 입석을 7일 동안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5만4700원. 이용 기간은 올해 기준 9월 6일까지이며, 티켓 발매 시한은 이달 31일까지다. 티켓은 전국 기차역 창구와 코레일 홈페이지에서 살 수 있다. 1544-7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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