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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⑨ 톈진(天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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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톈진(天津)시는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의 관문도시다. 톈진의 신개발구 ‘빈하이(濱海) 신구(新區)’는 상하이 푸둥(浦東)과 같은 국가급 전략 개발 구역이다. 서울의 관문도시인 인천 송도와 유사하다. 위상은 같지만 외자유치 성적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다. 빈하이 신구가 유치한 외국인 투자 총액은 송도의 100배에 달하는 46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톈진의 어제와 독특한 문화적 배경을 살펴본다.

신경진 기자

열강의 교두보 … 조계 면적 중국서 가장 넓어

79층 높이의 톈진 세계금융센터 전망대를 찾은 한 관광객이 톈진시 전경을 내려보고 있다. 톈진 세계금융센터는 창장(長江) 북부의 최고층 건물로 세계 고층건물 중 25위의 높이를 자랑한다. [중앙포토]



14세기 말 몽골이 세운 이민족 왕조 원(元)이 쇠락하자 전 중국은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난징(南京)을 점령한 명(明)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넷째 아들 주체(朱棣·훗날의 영락제(永樂帝))를 연왕(燕王)에 봉하고 북벌을 명했다. 원의 대도(大都·현재의 베이징)에서 몽골을 몰아낸 주체는 북방에서 황제의 꿈을 키워갔다. 하지만 주원장은 제위를 장손인 주윤문(朱允炆·건문제(建文帝))에게 물려주고 사망했다. 성난 주체는 조카를 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주체의 쿠데타 군은 소직고(小直沽)로 불리던 지금의 톈진에서 배로 갈아 타고 대운하를 따라 남하를 시작했다. 이른바 ‘정난(靖難)의 변’이다. 쿠데타에 성공한 뒤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긴 영락제는 ‘천자가 건넌 나루’라는 뜻으로 톈진(天津)이란 이름을 내린 뒤 성을 쌓고 연못을 파도록 명령했다. 톈진이라는 이름의 유래다. 톈진이란 이름은 그 밖에도 굴원(屈原)의 대표작 ‘이소(離騷)’ 중 ‘아침에 은하수 나루를 떠나(朝發軔于天津兮)’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하늘의 별자리 28수(宿) 하위에 속한 별의 이름인 천진(天津)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황제의 나루터이자 별자리의 나루터였던 톈진은 청(淸) 말엽이 되자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 침략을 위한 교두보로 전락했다. 전 중국에서 조계(租界)의 숫자와 면적이 가장 넓은 능욕의 도시가 됐다. 조계는 조약을 통해 한 나라의 영토에 행정자치권과 치외법권을 갖는 합법적인 외국인 거주지를 할양해 준 지역을 말한다. 보통 반식민지 국가가 열강에 통상도시 안에 빌려준 땅을 말한다. 당시 서구 열강은 1840년 아편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중국 시장을 빠르게 장악하지 못해 속을 태우고 있었다. 마침 1856년 광저우(廣州)에서 터진 애로호 사건은 2차 아편전쟁의 좋은 구실이 됐다. 서구열강은 1858년 톈진 다구포대(大沽炮台)를 점령해 톈진조약을 체결하고 베이징의 황실 공원 원명원까지 약탈한다. 1860년에는 베이징조약을 통해 옛 톈진성의 8배에 달하는 면적의 톈진 동쪽과 동남쪽 지역을 조계로 차지했다. 영국과 미국을 시작으로 1902년까지 프랑스·독일·일본·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벨기에 등 9개국 조계가 톈진을 잠식해 들어갔다.

제국주의 열강은 확보한 조계지를 자국 스타일의 건축물로 채워나갔다. 상하이 와이탄(外灘)에 견줄 만한 만국 건축박물관이 탄생했다. 조계지의 도로 이름도 각양각색이었다. 보통의 중국 도시가 동서 도로를 가(街), 남북 도로를 로(路)로 이름 붙이는데 반해 해안선으로 인해 대각선 도로가 발달한 톈진은 서북에서 동남쪽으로 향하는 대각선 도로는 로(路), 동북-서남선은 도(道)라고 이름 붙였다. 약 70개의 도로를 차지했던 영국은 지금의 해방북로(解放北路)인 금융중심가 빅토리아도(道)를 비롯해 디킨스·그리니치 등 유명인의 이름 및 영국 지명을 따서 이름 붙였다. 프랑스 조계는 직위를 덧붙인 사람 이름을 차용했다. 지금의 하얼빈도가 디옹총영사로였던 식이다. 독일 조계는 인명 이외에도 아라비아 숫자와 알파벳을 이용해 1호가, 2호가, A가, B가 식으로 이름을 지었고, 러시아는 페테르부르크로와 같이 러시아 지명을 이용했다. 이탈리아 조계는 마르코폴로·단테·피렌체 등 낭만적인 이름을 사용했다.

조계를 통해 서구 문명의 세례를 받은 톈진은 각성했다. 서구를 따라잡기 위한 양무운동의 전진기지가 됐다. 철도·전보·전화·근대교육 등이 중국 어느 지역보다 빠르게 보급됐다. 1903년 당시 직예총독 겸 북양통상대신이었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톈진에 신도시를 건설한다. 중국 최초로 서구 현대 도시 계획 이론을 채택해 ‘북양신성(北洋新城)’이란 이름을 얻었다. 신해혁명 이후 북양군벌 휘하로 들어간 톈진은 1923년 당시 총통 리위안훙(黎元洪)에 의해 잠시 중화민국의 정부 소재지가 되기도 했다. 1928년 국민혁명군이 점령하면서 톈진특별시가 성립됐다. 일본군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는 영국 조계를 무력으로 점령했다. 일본 패망 후에는 미군 2만 명이 톈진에 진주해 조계 지역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다. 국공내전 중이던 49년 1월에는 톈진을 포위한 34만 명의 공산당군이 29시간의 전투 끝에 국민당군을 물리치고 톈진 인민정부를 수립했다. 신중국 성립 직후 중앙직할시였던 톈진은 58년부터 67년까지 허베이(河北)성에 포함되기도 했다. 76년 7월 28일에는 진도 7.8의 탕산(唐山) 대지진 여파로 톈진에서 2만4345명이 사망하고 70여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는 비극을 겪었다.

19세기에 이미 외지인 천국 … 문화의 교차로 역할

톈진시 빈하이 신구에 위치한 유럽 에어버스 항공기 조립공장. 이 공장은 유럽 이외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에어버스 공장이다.(왼쪽)톈진의 대표적 먹을거리로는 거우부리바오쯔(狗不理包子) 만두, 얼둬옌자가오(耳朶眼炸糕) 찹쌀떡, 스바제마화(十八街麻花) 꽈배기를 꼽는다. 사진은 톈진의 대표적 먹을거리 타운인 남시식품가(南市食品街).



조계의 도시 톈진은 문화의 교차로다. 다원적인 문화가 중첩된 독특한 도시다. 톈진사범대 탄루웨이(譚汝爲) 교수는 톈진을 열 가지 문화코드로 해부한다. 첫째, 바다와 강(海河)의 문화다. 역사적으로 강줄기를 자주 바꿨던 황하는 세 차례 톈진 부근을 거쳐 보하이(渤海)로 흘러 들어갔다. 또 대운하와 대청하(大清河), 영정하(永定河)가 톈진을 지난다. 즉 톈진의 존립 기반은 물(水)이다. 물의 문화는 유동적이다. 톈진의 개방성과 포용성·다원성은 모두 물에서 나왔다.

둘째, 성(城) 문화다. 1920년대까지 남아있던 톈진의 옛 성은 고아(高雅)한 문화의 요람이었다. 성곽 안은 북쪽은 부유하고, 동쪽은 고귀하고, 남쪽은 천하고, 서쪽은 가난했다. 톈진 성곽을 따라서는 공북(拱北), 정남(定南), 안서(安西), 진동(鎭東) 4대문이 자리 잡았다. 성 안에는 문묘, 서원, 근대 교육시설과 문화 명인들의 옛 집들이 수많은 스토리를 품은 채 지금까지 전해내려 온다.

20세기 초에 제작된 톈진시 조계지도.

셋째, 사묘(寺廟) 문화다. 톈진에는 마조(媽祖) 여신을 모시는 사당, 공자를 제사 지내는 문묘와 관우를 모신 사당을 비롯해 대비원(大悲院)까지 도교·유교·불교 사원이 다양하다. 그뿐 아니라 이슬람 사원, 천주교 성당까지 다양한 종교 사원이 혼재하고 있다. 토착 주류 문화가 약하고 유동성이 강한 항구 도시 톈진의 주민들은 기복 신앙을 발달시켰고 여러 종교를 폭넓게 받아들였다.

넷째, 이민 문화다. 1845년 기록을 보면 당시 톈진의 토착민은 740호로 전체 거주민 총수의 2.28%에 불과했다. 톈진은 외지인의 천국이었다. 이민자 사회도 상·중·하 등급으로 나뉘었다. 하층 이민자들은 근대 공장의 노동자, 항구의 쿠리, 인력거꾼, 길거리 소매상을 비롯해 걸인까지 대도시의 밑바닥을 전전했다. 중산층 이민도 톈진으로 몰려들었다. 중소기업가, 지식인, 경영자, 과학기술자, 예술가들이 톈진 문화의 중추를 맡았다. 군벌정객, 망한 청나라의 유신, 지방 부호 등 상층 이민자들은 톈진 조계 지역으로 흘러 들어와 톈진시의 돈줄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대규모 이민은 남북과 아속(雅俗)이 뒤섞인 다양성의 자양분이 됐다.

다섯째, 군사 문화다. 명나라 영락제는 베이징 천도 후 톈진의 군사적 중요성을 의식해 군사 기지인 위(衛)를 설치했다. 제국의 수도와 제일 가까운 해변의 방어를 맡겼다. 주둔 병사, 조운 수비병, 이홍장(李鴻章)의 회군(淮軍), 위안스카이의 신군(新軍)이 톈진을 무대로 활약했다. 군인과 가속이 모여 살았던 톈진은 호탕하고 진솔하며, 호불호가 분명하고, 의롭고 용맹한 문화를 만들었다. 의화단사건과 톈진교안은 모두 톈진인 특유의 의협심의 발로였다.

여섯째, 조운(漕運) 문화다. 톈진은 역사적으로 북방 운하의 핵심지였다. 물류의 중심으로 교통의 중추였다. 해양신인 마조묘가 세워진 이유다. 조운은 남북의 곡물과 소금의 유통뿐만 아니라 문화의 교류와 융합을 가져왔다. 톈진은 수도의 문화와 이 지역에 있었던 연(燕)·조(趙)나라의 문화, 산둥의 제(齊)·노(魯) 문화뿐만 아니라 강남과 멀리 푸젠, 광둥의 민(閩)·월(粤) 문화까지 용광로처럼 녹여냈다.

일곱째, 개항장 문화다. 조운을 통한 상업의 기회와 소금 유통업의 발달은 톈진을 일약 북방 최대의 상업 도시로 변화시켰다. 톈진은 150여㎞에 이르는 해안선을 따라 염전이 발달됐다. 지금도 연간 240만t의 소금이 생산된다. 전 중국 생산량의 10분의1을 차지한다. 거대한 소금상인들은 문화의 스폰서 역할을 도맡았다. 명·청 이후에는 안후이·광둥·푸젠·저장·장쑤 등 남방 각 성의 상인들이 톈진으로 모여들었다. 각각 동향 회관을 만들어 조직을 꾸리고 상업 활동을 펼쳤다.

여덟째, 부둣가 문화다. 청대 이후 톈진은 수재 등 자연재해를 당한 난민들의 집결지였다. 부둣가의 시장 문화는 경극과 같은 민간예술을 발달시켰다. 또 거우부리(狗不理) 만두와 같은 특색 있는 음식도 탄생시켰다. 부둣가에는 유동 인구가 많다. 개방성과 포용성을 가져왔고, 경쟁력과 위기의식, 자유정신과 적응 능력도 생겼다.

아홉째, 앞에서 본 조계 문화다. 통상항구 톈진은 자본주의 세례를 받았고, 교회·서양식 상점과 상가들이 밀려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자선 문화다. 명·청대 톈진의 염상 부호들은 독실한 불교신자가 많았다. 선을 베푸는 데 아낌이 없었다. 자선소, 보육시설이 속속 생겼다. 지역의 유력자 신사(紳士)들은 자선기구를 경쟁적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복합적인 문화적 DNA를 가진 톈진은 지금 빈하이 신구에 유럽 에어버스 조립공장을 유치하는 등 첨단산업과 금융의 중심지로 미래를 향한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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