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욱
도쿄 특파원
서울에서 도쿄 특파원 부임을 준비하던 기자에게 평소 가깝던 취재원이 정상 외교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3월 동일본 대지진 직후 이명박 대통령과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가 전화로 나눈 대화 중 한 대목이었다. 평소 입이 무겁던 이 취재원은 “일본인들을 어떻게 대할지 한 수 배우고 도쿄로 떠나라”며 이야기를 꺼냈다.
통화는 이 대통령의 출장지인 아랍에미리트와 도쿄를 연결해 이뤄졌다. 당시 한국 외교부는 ‘대규모 구조대를 파견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지만, 일본 정부의 반응은 “구조견 두 마리면 된다”였을 정도로 시큰둥했다. 신세 지기를 내켜 하지 않는 특유의 국민성에다, 한·일 관계의 미묘함, 자존심 문제까지 겹친 듯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양국 외교부 레벨에서 서먹했던 분위기는 정상 간 통화에서 풀렸다. 일본인들의 기질을 감안한 이 대통령은 “돕고 싶다”는 직설화법 대신 우회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는 “일본에서 터진 재해는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도 다 일어날 수 있다”고 운을 떼며 “내 생각엔 만약 한국에서 그런 일이 터지면 일본이 가장 먼저 한국을 도울 것 같은데 어떠냐. 그렇지 않으냐”고 간 총리에게 물었다. 그러자 간 총리는 “당연하다. 일본이 한국을 가장 먼저 돕는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고, 이 대통령은 “그렇다면 이번엔 일본이 피해를 봤으니 우리 한국이 열심히 돕겠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개 두 마리에 불과했던 구조대 규모는 100여 명으로 불어났다.
구조대 파견 논의가 일단락되자 간 총리는 대뜸 이 대통령에게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러시아 체르노빌과 다르다”고 말했다고 한다. 원전 수출 강국 일본에 쏠린 여타 국가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싶은 간 총리의 속마음이 드러난 대목이다. 과거 현대건설 재직 시절 원전 사업에 참여했던 이 대통령은 “개인적으론 내가 더 (원전) 전문가인데 걱정 마시라. 일본과 체르노빌이 다른 건 내가 더 잘 안다”는 취지로 화답했고, 분위기는 더 훈훈해졌다는 것이다.
기자에게 에피소드를 들려준 취재원은 대화를 부드럽게 풀어나간 이 대통령의 외교 화술과 무용담을 부각하고 싶었겠지만, 기자는 다른 곳에 더 주목했다. 민간·정부 간에 얽힌 문제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정상외교의 위력, 정상들의 의지에 따라 국가 간의 관계가 바뀔 수 있다는 점이었다. 기자는 현 정부 출범 때부터 3년간 청와대를 취재하면서 일본과의 미래지향적 관계 구축에 대한 이 대통령의 애착을 종종 느꼈다. 독도 문제로 조성된 긴장국면 속에서 발표된 8·15 경축사의 표현이 “일본은 미래세대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칠 책임이 있다”는 수준으로 비교적 점잖게 다듬어진 데엔 대통령의 의지도 반영됐을 것이다.
간 총리에게서 바통을 넘겨받을 일본의 새 총리가 곧 선출된다. 양 손바닥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역사의 진실을 꿰뚫고, 한국민의 정서에 둔감치 않은 새 총리의 선출을 기대한다. 유력한 후보 중 한 사람이라는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재무상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合祀)된 A급 전범은 전쟁범죄자가 아니다”란 주장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등 전망이 썩 밝아 보이진 않지만 말이다.
서승욱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