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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청춘들 달구는 ‘루저’ 웹툰 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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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입사에 실패하고 승진에서 밀려난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웹툰(인터넷 연재 만화)이 젊은층의 ‘경쟁 스트레스’에 해방구가 되고 있다. 23세 대졸 백수 허세가 위대한 때밀이로 거듭나는 ‘목욕의 신’(위)과 사장 정복동, 점장 문석구, 파견사원 조미란, 원시부족 빠야족 등이 소비자 경영을 실천한다는 내용의 ‘천리마마트’.


‘병맛 만화’를 아시는지. ‘병맛’은 형편없는 대상을 뜻하는 인터넷 신조어다. ‘병신 같은 맛’의 줄임말로 알려진다. 요즘 포털 웹툰에서 ‘병맛 만화’가 뜨고 있다.

최고의 화제작은 ‘목욕의 신’(하일권)과 ‘쌉니다! 천리마마트’(김규삼) 두 편. 연재 때마다 2만여 개에 달하는 댓글이 달리고, 10점 만점에 9.9점의 별점을 받을 정도로 인기다.

 # 황당하지만 유쾌하다

 이름 허세. 23살 전문대졸 백수다. 빚 독촉에 시달리다 숨은 목욕탕 ‘금자탕’에서 예사롭지 않은 때밀이 군단을 만난다. 금자탕의 회장은 그에게서 위대한 때밀이의 자질을 발견하고, 때밀이가 될 것을 제안한다. 월급에 야근수당, 4대 보험까지 보장해준다. 잠시만 하고 그만둘 작정으로 입문한 때밀이의 세계, 의외로 가혹하다. 고된 수련기간을 거쳐야 하고, 나름 엄한 규칙을 따라야 한다.

 네이버에 연재 중인 ‘목욕의 신’의 내용이다. 때밀이들은 엄청나게 빠른 손놀림으로 허공에 때의 비를 뿌린다. 만화에 따르면 ‘그리스신화에서 우연히 누락’됐을 뿐인 목욕의 신 태미러스를 숭배하면서…. 황당한 설정, 대책 없는 영웅화인데도 젊은층이 열광한다.

 ‘쌉니다! 천리마 마트’도 어이없다. 경쟁자의 계략에 의해 문 닫기 직전의 천리마마트 지점장으로 좌천된 정복동 사장. 본사에 앙갚음할 속셈으로 기상천외한 전략을 구사한다. 건달·해고자·고졸을 채용하고 프랜차이즈가 아닌 동네 제과점을 입점하는 식이다. 영세상인의 상품을 납품가 세 배로 올려 팔기도 한다. 그런데 망하기 직전이었던 마트에 활기가 돈다. 직원과 소비자 중심의 경영이 낳은 결과다.

 허세나 정복동은 현실세계에선 ‘루저’(패배자)다. 입사에 실패했고 승진에서 밀려났다. 그런데도 만화 속의 그들은 기성 질서로부터 일탈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자기비하가 없다. 심각한 고민 대신 유쾌한 웃음이 어우러진다.

 #경쟁과 권위에 대한 풍자

 ‘병맛 만화’의 배경엔 젊은 세대의 ‘경쟁 스트레스’가 있다. 대학생 전민정씨는 “취업경쟁에 밀려날까 늘 불안했다.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현실에 허무함도 밀려온다. 그럴 때 웹툰을 보면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유쾌한 루저’ 코드가 웹툰에서 각광받는 이유는 뭘까.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박석환 팀장은 “대본소 만화가 전문지식을 다루는 교양주의에 빠져있을 즈음 탈권위적인 것을 추구하는 문화적 흐름이 웹툰으로 표출된 것 같다”고 말했다. 경쟁과 권위를 조롱하는 20대의 정서가 포털에서 폭발했다는 설명이다.

 댓글을 통한 실시간 피드백이 활발한 점도 디지털 세대의 문화소비와 잘 들어맞는다. ‘목욕의 신’의 하일권 작가는 “세상의 어느 것도 하찮지 않다. 누구나 저마다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웹툰을 통해 그 가치를 찾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강혜란 기자, 신소영(중앙대 문헌정보학), 남보영(성균관대 경제학) 인턴기자

◆하일권=1982년생. 2006년 파란 웹툰 ‘삼봉이발소’로 데뷔. 2008년 대한민국 만화대상 신인상 수상. ‘두근두근거려’ ‘3단합체김창남’ ‘안나라수마나라’ 등.

◆김규삼=1975년생. 2000년 영챔프 단편 ‘킬러 레옹’으로 데뷔. ‘미드나이트원더러’ ‘더하우스오브더데드’ ‘입시명문 사립정글고등학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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