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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양함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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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1894년 9월 17일 오전, 압록강 하구에서 대해전이 펼쳐졌다. 한반도로 병력을 수송하던 청의 북양(北洋)함대를 일본 함대가 덮친 것이다. 이 전쟁의 승패를 가른 황해 해전의 시작이었다.

 청의 실력자 이홍장은 아편전쟁의 치욕을 씻자는 명분으로 서태후를 설득해 1871년부터 4개의 현대식 함대를 출범시켰다. 특히 북양함대는 규모가 남달랐다. 독일제 쌍둥이 전함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은 배수량 7300t에 12인치의 주포를 장착해 당대 최고 수준의 위용을 뽐냈다. 이 밖에 8척의 순양함을 포함한 총 55척, 배수량 5만t의 규모는 동아시아 최강을 자부할 만했다.

 그러나 실전 결과는 비참했다. 황해 해전 개전 직후 기세 좋게 일본 함대를 겨냥한 진원함의 주포는 발사와 함께 폭발해 버렸다. 설계 결함 때문이었다. 단 한 번의 발포로 진원함은 전투불능 상태가 됐고, 사령관 정여창(丁汝昌)도 부상을 입었다. 전 함대가 일시에 무너졌다. 전투는 5척의 전투함과 850명의 병사를 잃은 중국의 참패로 끝났다.

 역사가들은 승부가 이미 결정돼 있었다고 말한다. 겉보기와는 달리 북양함대는 훈련 부족과 정비 불량에 시달리고 있었다. 운영 기금으로 책정됐던 2000만 냥의 자금이 서태후의 회갑 기념으로 별장 이화원(頣和園)의 수리에 전용됐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역사가 고지마 신지(小島晋治)의 ‘중국 근현대사’에 따르면 1894년 당시 북양함대는 일본 함대에 비해 속도에서 평균 1해리 뒤졌고, 함선은 평균 2년 노후돼 있었으며, 포 발사 속도는 4배나 더 걸렸다.

 일본은 여세를 몰아 이듬해 2월 17일 북양함대의 모항 웨이하이웨이(威海衛)를 봉쇄했다. 진원은 어뢰를 맞고 격침됐고, 정원은 나포돼 깃발을 바꿔 달고 일본 해군에 편입됐다. 대양으로 진출하려던 중국의 꿈은 이 패전으로 물거품이 됐다. 이후 100년 넘게 중국은 자랑할 만한 해군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던 중국은 1998년 수입한 러시아제 항공모함 바랴크의 개장을 마쳐 이달 안 진수를 앞두고 있다. 구형이지만 6만t급의 대형함이다. 바랴크의 중국 이름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과거 북양함대가 창설된 도시명인 ‘톈진’이 유력하다는 보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국이 북양함대의 꿈을 되살리며 흐뭇해 하고 있는 대목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송원섭 jTBC 편성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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