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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벤처 1번지 “시부야엔 ‘닷컴’이 없다”

중앙일보

입력

2천~3천개의 日 벤처기업들이 포진돼 있는 도쿄 시부야 거리. 일본 도쿄 시부야-.

노란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휴대폰전화를 필수품으로 들고 다니는 일본 젊은이들이 항상 넘실대는 이곳을 언제부턴가 일본경제인들은 ‘비트 밸리’(bit balley)라고 부른다. 일본의 벤처기업인들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테헤란 밸리쯤 된다. 일본 벤처 1번지인 셈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이곳은 닷컴(.com)을 보기 힘들다. 고층건물마다 큼직 큼직한 글씨로 쓴 닷컴 새 간판이 즐비한 한국의 강남 테헤란 밸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도쿄 시내를 순회하는 지하철 마루노우치(丸の內)선 열차 안-. 리크루트사에서 운영하는 생활관련 포털사이트 ‘isize.com’광고 정도가 걸려 있는 게 고작이다.

벤처 열풍의 산실인 한국의 테헤란 밸리와 도쿄의 비트 밸리의 이같은 차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직 일본에는 벤처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은 편은 못됩니다. 제대로 된 수익구조도 없으면서 거품만 가득한 게 벤처라는 선입관이 있어요.”

소규모 벤처 기업가들의 모임인 SVC(Soho Valley Commons)를 이끌고 있는 경제전문가 후지와라 나오야 회장(39)은 보수적인 일본사회가 아직 벤처기업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드러내놓고 ‘닷컴’간판을 내걸기보다는 빌딩 속에 두더지처럼 파묻혀 있다는 것이다.

사실 ‘벤처’라는 용어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도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주로 모험적인 인터넷 또는 바이오 산업을 지칭하지만 일본에서는 전통적인 산업에 새로운 방법론을 동원한 소규모 창업까지를 포함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우리 나라처럼 정부차원에서 벤처기업에 베푸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도 없다.

벤처기업을 둘러싼 환경이 다르다는 점도 비트 밸리와 테헤란 밸리의 분위기를 달리하는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벤처 창업이 가장 왕성한 세대가 40대이며 50대도 전체의 약 20%나 된다는 사실도 인터넷 관련 이외의 벤처 창업이 많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20, 30대가 주로 창업하는 인터넷 관련 벤처를 일본에서는 ‘e-벤처’라고 구분지어 부른다.

하나의 매장에서 서적과 음반, 비디오를 한꺼번에 구입하거나 빌릴 수 있는 ‘CCC’는 일본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벤처기업으로 꼽힌다. 책은 서점, 음반은 레코드가게 식으로 구분짓던 기존 시장을 ‘복합적인 문화공간’이라는 개념으로 깨부순 CCC는 지난 85년 설립돼 현재 전국에 1천개 체인점을 갖출만큼 성장했다. 최근에는 한국에까지 진출해 ‘시큐브클럽’이란 이름으로 문화상품 시장의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전통적 유통산업에 새로운 방법론을 동원해 폭발적인 성공을 이뤄낸 CCC는 늘 벤처기업의 ‘선배’로 대접받고 있다.

오프라인 비즈니스를 통해 1천만명이 넘는 회원의 상세한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는 CCC는 디지털 시대를 맞아 지난 해 7월부터 엔터테인먼트 정보서비스인 TSUTAYA online을 개설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오프라인에 탄탄한 기반을 둔 온라인 비즈니스 전개는 온라인 쪽에만 정신이 쏠린 우리 벤처기업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후지와라는 “일본에서는 아무리 온라인 비즈니스라고 해도 수익구조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으면 인정받을 수 없다”며 한국의 인터넷 관련 벤처기업들도 앞으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결합해 수익 모델을 만들어 내는데 신경쓸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미국 뉴욕의 이른바 ‘실리콘 앨리’에는 ‘뉴욕 뉴미디어 어소시에이션’(NYNMA)이 있으며 서해안의 ‘실리콘 밸리’에는 ‘멀티미디어 디벨로프먼트 그룹’(MDG)이라는 비영리단체(NPO)가 있다. 모두 정보공유나 교류를 통해 벤처를 지원하는 커뮤니티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파티나 토론회를 통해 벤처사업가들은 새로운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찾거나 제휴를 모색하곤 한다. 실제로 그 곳을 통해 수많은 인터넷 성공기업이 배출되기도 했다.

시부야에 비트 밸리라는 새로운 생태계가 탄생한 것은 “우리도 미국처럼 벤처를 키우는 커뮤니티를 만들자”는 자연스런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 움직임은 지난 해 봄부터 조용히 시작됐다. ‘네트이어’의 고이케 아키라, ‘네트에이지’의 니시가와 기요시, ‘인터큐’의 구마가야 등 비트 밸리에서 이름이 알려진 벤처기업 사장들은 대부분 ‘술자리 모임’이나 ‘벤쿄카이(공부회)’를 통해 교류의 폭을 넓혀 왔다.

이러한 교류의 기회를 보다 조직화하자는 취지 하에 만들어진 것이 비영리단체인 비트 밸리 어소시에이션(Bit Valley Association). 지난 해 설립된 이 단체는 2000년 1월 말 현재 회원수 4천6백명을 넘어섰으며 그 숫자는 지금도 늘어나고 있다. 또 월 1회 열리는 상호교류회인 ‘비트 스타일(Bit Style)’도 당초에는 회원 1백50여명에 불과한 ‘술자리 모임’으로 출발했으나 지난 해 말부터 종합상사와 벤처캐피털 관계자들이 가세하면서 회원수가 일거에 1천명으로 늘어나게 됐다.

연말 모임에는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가 참가했으며 지난 2월 모임에는 하야미 마사루 일본은행 총재가 참가해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시부야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모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트 밸리에 ‘닷컴’간판이 없다고 해서 벤처 열풍이 잠잠한 게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비트 밸리와 테헤란 밸리의 또 다른 차이점은 엔젤이나 창투사의 투자분위기다. 넘쳐나는 자금이 인터넷 관련 벤처기업으로 몰려들고 있는 테헤란 밸리의 분위기와는 달리 비트 밸리의 벤처기업들은 그야말로 자력으로 버티고 있는 곳이 많다.

후지와라가 이끄는 SVC의 2백여 벤처기업들도 외부의 도움 없이 기술력과 벤처정신만으로 버티고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SVC의 벤처사업가들은 “거품이 걷혀도 살아 남는 기업이야말로 진정한 벤처”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1백년 전통 경제지 도요게이자이 신문이 발행하는 벤처전문 월간지 ‘벤처클럽’에서 한국통으로 통하는 간노 도모코 기자는 “별다른 수익구조도 없이 미래에 대한 청사진만으로 엔젤을 끌어모으고 있는 한국의 벤처기업들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확실한 수익구조가 있는 벤처기업들에 한해 창투사나 엔젤들의 자금이 선별적으로 들어오는 일본의 상황은 한국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비트 밸리에 ‘닷컴’간판이 없다고 일본인들이 디지털 혁명에 소극적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질서 속에서 조용하게 변화를 시도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 변화의 배후에는 1천7백만명(98년 11월 시점·통신백서)에 달하는 인터넷 이용자들이 버티고 있으며 그 숫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현해탄을 사이에 둔 한·일 양국의 밸리에는 이처럼 분위기는 다르지만 확실하게 디지털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양국 모두 미국 실리콘 밸리에만 관심이 있을 뿐 서로의 존재를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벤처클럽측도 “독자들이 한국의 벤처기업엔 별로 관심이 없어 취재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고 말했다. 후지와라는 “한·일 양국의 벤처사업가들이 활발한 교류의 기회를 갖는다면 윈-윈(Win-Win)할 수 있을 것”이라며 앞으로 비트 밸리와 테헤란 밸리의 벤처 기업가들을 연결해 주는 가교 역할을 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테헤란 밸리의 역동성과 비트 밸리의 차분함은 서로에게 약(藥)이 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에서다. 비트 밸리에는 ‘닷컴’간판은 없지만 분명히 ‘닷컴’은 있었다.

글 : 도쿄 시부야=김국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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