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국내 은행들 외국 주주 입김에 시달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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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은행 시장이 외국계 거대 금융그룹들의 대리전장으로 바뀌고 있다.

제일은행이 이미 외국계 은행으로 바뀐 데 이어 한미은행의 최대주주도 곧 미국계 투자회사로 변경될 것으로 예상되는 등 외국계 은행.보험.자산운용회사들의 국내은행 지분인수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들이 다투어 외자유치에 나서면서 이미 예상했던 일이긴 하다. 그러나 국내은행들이 외국 대주주의 입김에 지나치게 휘둘릴 경우 열심히 벌어서 대주주 좋은 일만 시키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 토종은행이 사라지고 있다〓지난해 미국계 뉴브리지캐피털이 제일은행을 인수한 이래 현재까지 외국 금융기관이 최대주주로 변했거나 일부 지분을 인수한 국내은행은 제일.주택.국민.외환.하나은행 등 모두 6개.

올 들어 미국계 투자회사인 카알라일그룹이 한미은행 지분인수를 추진하고 있으며, 자산규모로 세계 최대은행인 독일의 도이체방크가 '경영정상화 후 일부 주식매입' 조건으로 서울은행 지분참여를 타진하고 있다.

카알라일그룹은 세계 1백26개국에 33억달러를 투자하고 있는 국제적인 투자펀드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자문역을 맡고 있다. 카알라일은 이번에 한미은행이 발행할 4억5천만달러 어치의 해외 주식예탁증서(DR)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지분 34%를 취득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한빛.조흥은행 등 정부출자 은행들도 해외 DR 발행 방식의 외국지분 참여를 적극 추진하고 있어 시중은행 가운데 순수 토종은행은 앞으로 거의 없어질 전망이다.

이는 조만간 닥쳐올 제2차 금융구조조정에서 우위에 서려는 국내은행들의 입장과 한국에 거점을 마련하려는 외국 거대 금융그룹들의 전략이 맞아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중은행들은 특히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부의 입김을 벗어나기 위해 외국계 금융기관과의 제휴를 적극적으로 추진 중이다.

◇ 불가피한 대리전〓하나은행 최대주주로 부상한 알리안츠는 하나은행 지점망을 통해 한국 보험시장에서 선두업체로 발돋움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 경우 주택은행과 제휴한 네덜란드계 ING생명과 경합이 불가피하다.

알리안츠는 조만간 한국에 자산운용회사를 설립, 투신업에도 뛰어들 계획. 국민은행의 최대주주인 골드먼삭스도 한국의 자산운용시장에 뛰어들 방침을 밝히고 있어 하나은행과 국민은행은 어떤 형태로든 외국 대주주들의 경쟁을 도와주게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서울은행 인수에 실패한 영국계 HSBC은행은 외환은행의 대주주인 코메르츠방크를 인수할 경우 한국 시장 진출을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알려졌다.

HSBC가 코메르츠를 인수하고 이에 따라 외환은행의 외국인 최대주주가 된다면 외환은행은 영업전략이나 인사 등 여러 면에서 궤도수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당초 국민은행 지분인수 목적을 자본참여만으로 제한했던 골드먼삭스는 지난 16일 국민은행 주총에서 부사장급 경영인을 사외이사로 선임시켜 은행경영에 발언권을 강화할 의사를 비췄다.

이와 관련, 김상훈 신임행장은 최근 "골드먼삭스를 경영에 참여시키겠다" 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한국금융연구원의 최공필 박사는 "국제화시대에 국내은행들의 외국자본 유치는 피할 수 없는 대세지만 제휴과정에서 목적과 한계를 명확히해야 한다" 면서 "자칫하면 국내은행들이 외국 금융기관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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