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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갈라 놓던 바다가 연인을 이어주는 공간으로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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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호 10면

바야흐로 피서철이다. 동해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주차장처럼 변하고 해수욕장이 목욕탕처럼 북적이는 계절이 된 것이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19> 항구에서 해변으로, 바다의 변신

지금은 대중가요 속에서 바다란 오로지 여름날 피서지 혹은 한적한 휴양지로만 인식되지만, 식민지 시대부터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혀 달랐다. 남진(사진)의 초기 히트곡으로 유명한 다음의 노래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 해 저문 부두에서 떠가는 연락선을 /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 갈매기도 내 마음처럼 목메어 운다”(남진의 ‘가슴 아프게’, 1968,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이외에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등 60년대에 바다를 항구의 이별로 연결 짓는 노래는 의외로 많다. 물론 이런 노래의 태반은 트로트 계열의 노래다. 30년대 트로트가 본격화된 시기부터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남인수의 ‘울며 헤진 부산항’ 등을 거쳐 50년대 박경원의 ‘이별의 인천항’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항구 노래가 인기를 모아왔다. 60년대 말의 이런 노래는 올드 페션의 뒷심을 보여주는 노래였던 셈이다.

식민지 시대의 대중가요에서 바다가 늘 항구로만 등장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개항이 되기 이전까지 우리나라 서민의 노래에서 바다란, ‘이어도사나’ 같은 어촌 민요를 빼놓고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소재였다.

그러나 강대국이 바닷길을 통해 들어온 이후 바다는 새로운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최남선의 신체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가 웅변적으로 보여주듯, 육지를 중심으로 했던 조선인의 머릿속 지형도는 저 험한 바다 건너편의 문명의 세계를 상상하는 방식으로 급격히 달라졌다. 지금 듣기에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한적한 지방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별 노래인 것처럼 들리지만, 식민지 시대 목포는 일본과 전남 곡창지대를 잇는 매우 중요한 항구이고 화려한 신도시였다. 즉 이 시대 항구는 외국으로 나가는 관문이었고, 항구의 이별 장면은 요즘으로 치면 인천국제공항에서의 이별 장면만큼이나 멋진 장면이었을 수 있다. 이런 항구 노래가 70년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80년대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관행은 정말 끈질긴 것이었다.

물론 변화도 없지 않다. 해방이 돼 일본과의 뱃길 왕래가 줄어들고 비행기를 통해 외국 나가는 것이 시작된 60년대가 되면, 항구는 이렇게 멋진 이미지로 등장하지 못한다. 오히려 바다는 육지와 섬을 가로막은 절망적 장애물로 등장한다. 남진의 ‘가슴 아프게’의 ‘해 저문 부두’와 ‘연락선’이 그리 화려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이유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 열아홉 살 섬색시가 순정을 바쳐 / 사랑한 그 사람은 총각 선생님 /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1966, 이경재 작사, 박춘석 작곡)

남진도 조미미도 마치 바다가 모든 것의 문제인 것처럼 ‘저 바다만 없었다면’ ‘바다가 육지라면’이라 노래했지만, 교통수단이 다 있는 시대에 능력만 있다면 그까짓 바다가 무슨 장애가 되겠는가. 문제는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 사이에 뛰어넘지 못하는 다른 벽이 있는 것이다. 저학력의 가난한 섬 처녀와 서울 출신 대졸자의 뛰어넘지 못하는 계층의 벽이 있으니, 바다만 보고 울고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서울에서는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산업화가 한창이던 60년대에 벽을 뛰어넘을 자신이 없었던 소외된 사람들의 절망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보여주는 노래들인 셈이다.

그러나 70년대 초 청년문화 바람이 불면서 바다는 전혀 다른 대상으로 대중가요에 나타났다. 윤형주의 ‘라라라’(“조개껍질 묶어…”)가 그러했듯, 이들 세대에게 바다는 해수욕장과 피서지로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 /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 줘요 / 연인들의 해변으로 가요 /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해도 /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 거예요 / 불타는 그 입술 처음으로 느꼈네 / 사랑의 발자욱 끝없이 남기며 / (하략)”(키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 1970, 외국 곡)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로커 재일교포 이철의 작품을 키보이스가 취입해 크게 히트했다. 일본 노래이기 때문에 창작자를 제대로 밝히지 못한 채 수십 년이 지나버린 노래다. 이 노래뿐 아니라 키보이스의 ‘바닷가의 추억’, 사월과오월의 ‘바다의 여인’ 등 대중가요 속의 바다는 ‘항구’에서 ‘해변’으로 바뀌어 갔다.

“서울을 떠나는 기차를 타고 들판을 넘어 산속 계곡 따라 / 시간이 있으면 절에도 들러 보고 동굴 속에서 소리도 쳐 보네 / 잔뜩 짊어 메고서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서 / 동네 어귀에도 내려 볼까 그렇지만 바닷간 어떨까 / (하략)”(여행스케치의 ‘여행스케치’, 1989, 박선주 작사·작곡)

휴가지로서의 바다는 산보다는 훨씬 더 소비적이기는 하다. 산이 땀 흘리고 난 인고와 성취의 느낌을 주는 공간이라면, 바다는 오로지 소비하고 욕망을 노골화하는 피서지다. 80년대식 젊은이의 소박한 여행의 분위기를 풍겼던 여행스케치가 바닷가보다 산을 먼저 배치한 것은 그 때문이리라. 하지만 여름에 바닷가의 그 유혹에서 어찌 벗어날 수 있으랴.

해변에 수영복 차림으로 나설 일을 생각하며 몇 달 전부터 돈을 모으고 몸매를 가꾸는 것이 젊은이들의 당연한 일처럼 되어 버린 지 오래지만,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한국인의 노래 속의 바다는 이토록 복잡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와 『광화문 연가』 등 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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