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할리의 부활’이 주는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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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진
경제부문 기자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자랑인 할리데이비슨(이하 할리) 모터사이클은 단순한 운송수단이 아니다. 서부 개척사를 담은, 미국을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이다. 이곳 사람들은 간편한 복장으로 대형 할리를 즐겨 탄다. 생활의 한 부분이다.

 할리는 1903년 밀워키의 허름한 창고에서 자전거에 소형 엔진을 달면서 시작했다. 창업자의 증손자인 빌 데이비슨 부사장은 “말을 타고 대륙을 횡단하며 자유를 누렸던 경험을 모터사이클에 접목한 게 성공 요인이다. 이런 미국적 가치를 담은 모터사이클은 할리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말을 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주기 위해 지금도 엔진의 진동과 소리를 줄이지 않는다.

 승승장구하던 할리는 60년대 부도에 몰린다. 혼다·야마하 같은 일본 메이커들이 할리를 모방해 대량생산을 앞세워 가격을 내리고, 훨씬 좋은 품질과 성능으로 도전한 것이다. 소비자 입장에서 운송수단으로 모터사이클을 샀다면 할리보다 30% 싼 일제를 선택한 게 당연했다. 결국 할리는 69년 레저회사인 AMF에 인수됐다. 시장에서 차별화하지 못한 게 패인이었다. 대량생산과 품질이라는 시장의 룰을 따라가기에만 급급했다. ‘미국적 가치’라는 비장의 무기는 써보지도 못했다. 오죽하면 할리는 일본제를 본뜬 스쿠터까지 만들 정도였다.

 그러다 81년 할리 보드멤버 13명이 ‘더 이상 브랜드를 망칠 수 없다’며 주식을 매입해 독립한다. 2년 후에는 독특한 영업방식을 선보인다. 할리를 소유한 오너들을 조직해 미국적 가치를 지키는 홍보대사 격인 동호회 호그를 창립한 것. 이후 할리는 일본업체를 누르고 미국에서 최고 영업이익률 내는 제조업체로 변신했다. 품질과 성능은 여전히 뒤졌지만 생존의 방법을 찾았다. 미국적 가치를 브랜드화한 셈이다. 그래서 여태껏 미국에서만 생산한다.

 할리의 생존법은 우리나라 기업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동안 우리 기업들은 일본업체 추격에 바빴다. 일본제와 비슷한 품질에 싼 가격으로 승부해 성공을 거뒀다. 문제는 ‘따라잡기’만으로는 장기적 생존이 어렵다는 점이다. 할리가 108년간 생존한 이유, 미국적 가치를 제품에 담아 차별화한 데 있다. 자기만의 고유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게 장수기업의 답이 아닐까 한다.

김태진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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