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경제학] 9. 피아노의 품질경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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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은 만국박람회(엑스포)의 시대였다. 세계 각국의 산업기술과 문화가 한 자리에 모이는 '산업.문화 올림픽' 이었다. 당시 중산층의 부(富)와 교양을 상징했던 피아노는 엑스포 관람객에게 인기 품목이었다.

프랑스 지휘자 아돌프 쥘리엥이 이끄는 합동군악대의 연주로 막이 오른 1851년 런던 엑스포에서 미국산 피아노가 유럽에 첫선을 보였다. 하이드파크 크리스탈 팰리스에는 6백만명의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1만3천여종의 전시품 중 피아노는 1백78종. 악기품평회에서 에라르(파리).치커링(보스턴).애디슨(런던)이 금상을 수상했다.

1853년 독일 출신의 캐비넷 제조업자 하인리히 슈타인베크가 뉴욕에서 창립한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1855년 뉴욕 엑스포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덕분에 연간 매출이 2년만에 3배(2백8대)로 뛰어 올랐다.

스타인웨이가 유럽에 '데뷔' 한 것은 1862년 런던 엑스포. 당시 런던 최고의 피아니스트들이 모여 들어 아침부터 밤새도록 스타인웨이를 두들겨댔다.
브뤼셀 왕립음악원장 조제프 페티, 캠브리지대 교수로 있던 작곡가 스턴데일 베네트, 슈투트가르트에서 온 피아노업계 원로 쉬트마이어 등이 심사위원을 맡았다. 브로드우드(런던)와 스타인웨이가 각각 대상과 금상을 수상했다. 스타인웨이의 '강력하고, 명쾌하고, 화려하고, 감동적인 톤' 을 높이 산 것이다.

1867년 파리 엑스포에서는 치커링.스타인웨이.브로드우드가 금상, 베흐슈타인(베를린).뵈젠도르퍼(빈)가 은상을 수상했다. 치커링.스타인웨이는 피아니스트 섭외와 팸플릿 제작 등 엑스포 홍보 비용으로 8만달러씩 지출했다. 치커링은 성조기와 삼색기를 흔들면서 시가행진을 벌였고 금메달을 대형으로 복사해 본사 건물 꼭대기에 걸어 놓았다.

1872년 스타인웨이사는 2중 공명현(듀플렉스 스케일)으로 특허를 받았다. 높은 음역의 배음을 강조해 더 밝고 화려한 소리를 내게 하는 장치다. 1873년 빈 엑스포에 출품된 피아노의 3분의 2가 스타인웨이를 모방했다. 미국산 피아노의 쾌거였다.

헨델의 '할렐루야' 연주로 개막 테이프를 끊은 1876년 필라델피아 엑스포에서 스타인웨이는 마침내 최고상을 받았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스타인웨이가 심사위원들을 매수했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하지만 유럽산 피아노가 미국산을 능가할 수 없는 것은 현실이었다.
1900년 파리 엑스포, 1904년 세인트루이스 엑스포에서도 미국의 볼드윈 피아노가 연거푸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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