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318> 숫자로 풀어본 역대 총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8면

요즘 한나라당이 전격적으로 ‘반값 등록금’ 정책을 마련한 데 대해 정치권에선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이 점점 왼쪽으로 가고 있다며 ‘좌클릭’ 논란이 한창입니다. 민주당은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등과 ‘야권 연대’ 수준을 넘어 ‘야권 통합’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게 다 내년 4월 총선 때문입니다. 그만큼 총선은 정당에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유권자들에겐 어떨까요. 지난 18대(2008년 4월 9일) 총선의 투표율은 46.1%였습니다. 전국 동시 선거 중 역대 최저의 투표율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어땠을까요. 우리나라 총선의 역사를 숫자로 되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김경진 기자

1948년 미 군정 치하 … 748만 여명 투표 참가

1948년 5월10일 실시된 남한 단독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기표소에서 투표하고 있다. 기표소 안쪽에 장면 박사 등 후보자들의 이름과 사진이 실려 있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95.5%. 우리나라 총선 역사상 최고 투표율입니다. 유권자 100명 중 95명 이상이 투표장에 나갔던 거지요. 유권자 2명 중 1명도 채 투표장에 나가지 않았던 18대 총선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입니다. 과연 언제 이런 전무후무한 투표율이 나왔을까요.

정답은 1948년 5월 10일 미 군정 법령에 따라 치러진 첫 총선거입니다. 해방 이후 처음 치러지는 총선이니 국민의 관심이 뜨거웠던 거지요. 당시 만 21세 이상 유권자 784만871명 중 748만7649명이 투표에 참가했다고 합니다. 총선에 후보자를 낸 정당과 사회단체도 48개에 달했습니다. 48개 중엔 후보자를 한 명만 낸 ‘1인 정당·단체’가 26곳이었습니다. 막상 투표를 하고 뚜껑을 열었더니 당선자가 없는 ‘불임 정당’과 단체도 31개에 달했습니다. 정당다운 정당이 없었던 만큼 대부분의 후보자는 무소속으로 출마했습니다. 전체 후보자 948명 중 44%에 해당하는 417명이 무소속이었습니다.

2대 총선, 의원 당선자 중 무소속이 60%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의 합동유세 현장.

1대 총선의 임기는 2년으로 마무리됐습니다. 한시적으로 제정됐던 선거법이 폐지되고 새로운 선거법에 따라 1950년 5월 30일, 2대 선거가 실시됩니다. 2대 총선엔 후보자가 몰려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습니다. 1대 총선에 참여하지 않았던 ‘남북협상파’와 중도 계열까지 후보자를 내며 평균 10.5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죠. 2대 총선 때는 1대 총선 때보다 무소속 출마자가 더 늘었습니다. 전체 출마자의 10명 중 7명(68.5%)이 무소속 출마자였습니다. 무소속 당선자 수는 126명으로 의원 정수(210석)의 60%나 됐습니다. 2대 총선에선 헌정 사상 최초로 여자 당선자 2명이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공천제 첫 실시된 3대 총선 … 사라진 7개의 선거구는?

3대 총선(54년 5월 20일)은 여당인 자유당과 원내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이 각각 후보자를 추천해 선거 사상 처음으로 의원 후보자 공천제가 실시됐습니다. 또 처음으로 정당에 의한 여야 대결의 선거전이 전개됐습니다. 3대 총선은 이 때문에 오늘날의 정당정치가 자리 잡는 데 토대가 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3대 선거는 그러나 2대 선거에 비해 선거구 수가 7곳이 준 203곳에 그쳤습니다. 바로 휴전선 이북 7개의 선거구가 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개성시, 개풍군, 장단군, 연백군갑·을, 옹진군갑·을입니다.

양당제 정착된 4대 총선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 대회의실에서 김영삼 민주·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배석한 가운데 3당(민정+민주+공화) 합당을 선언하고 있다.

4대 총선(58년 5월 2일)은 민의원선거법에 따라 치러졌습니다. 민의원선거법은 우리 의회 사상 최초의 ‘여야협상위원회’가 구성돼 만들어졌습니다. 또 4대 총선에선 의원 후보자의 난립을 막기 위해 기탁금 제도를 신설했습니다. 유효 투표율의 6분의 1을 득표하지 못할 경우에는 기탁금을 돌려받지 못하도록 한 것이죠. 이 때문에 선거는 여당인 자유당과 제1야당 민주당의 양자 대결로 압축됐습니다. 자유당이 126석(54%), 민주당이 79석(34%), 무소속이 27석(11.5%)을 차지했습니다. 이로써 군소 정당들이 몰락하고 오늘날의 양당 제도가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4대 총선에선 112명의 초선 의원이 당선돼 신인들의 약진이 두드러졌습니다.

5대 총선서 24시간 동안 선거운동이 중지된 이유

다른 나라 대통령이 서거했다고 우리나라의 총선 선거운동이 중단됐다면 믿으시겠어요? 6대 총선 선거일(63년 11월 26일)을 사흘 앞둔 63년 11월23일 미국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을 당합니다. 당시 고인에 대한 조의를 표하기 위해 선거운동이 일절 중단됐습니다.

이 6대 총선에선 선거 사상 최초로 선거구를 지역구와 전국구로 나누고, 전국구 비례대표제가 도입됐습니다. 또 후보자 입후보제를 정당추천제로 바꿨습니다. 그러다 보니 후보자들은 정당을 필요로 하게 됐고, 12개에 달하는 정당이 우후죽순 생겨나게 됩니다. 이 때문에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에선 최초의 ‘야권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게 됩니다. 비록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후보 단일화’의 모태였던 셈입니다.

9대 총선, 지역에선 73명만 당선 … 의석수는 146명

72년 유신헌법이 제정된 이후 이듬해 치러진 9대 총선에서는 73개의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을 2명씩 뽑는 중선거구제에, 대통령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간접 선출하는 두 가지 선출 방식이 병행됐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 선출된 의원들이 구성한 원내교섭단체가 유신정우회입니다. 9대 총선 결과 원내는 여당인 민주공화당 73명, 신민당 52명, 무소속 19명 등으로 구성됐습니다. 그러나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 수가 73명이었기 때문에 민주공화당 의원 수(73명)와 합치면 사실상 여당이 146석의 의석을 확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죠.

11대 총선서 민정당 92명 출마시켜 90명 당선

11대 총선(81년 3월 25일)에서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출마한 지역구 공천자 92명 중 90명이 당선됐습니다. 97.8%라는 공천 대비 최고 당선율을 기록한 것이죠. 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이 기록적인 당선율을 보인 데는 한 지역구 내에서 여야 2명이 당선되는 중선거구제의 영향이 컸습니다. 당시 야당에선 전두환 대통령이 순방한 34개 시·군마다 여론이 민주정의당으로 기울었다며 이를 ‘원폭 투하’라고 꼬집기도 했습니다. 광주 지역의 2개 선거구에서도 민주정의당 후보자가 당선됐습니다. 10개월 전 5·18 민주화 운동의 상처가 계속되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랬죠.

13대 총선, 노태우 대통령과 3김의 대결

13대 총선(88년 4월 26일)은 13대 대선에서 승리한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김대중·김종필씨 등 이른바 ‘3김(金)’의 대결로 치러졌습니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125석을 차지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습니다. 평화민주당이 70석, 통일민주당이 59석, 신민주공화당은 35석을 차지했습니다. 야당 의석수가 174석(한겨레민주당 1석, 무소속 9석)에 달하는, 의정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된 겁니다.

이 힘을 바탕으로 야당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한 청문회를 개최하고 전두환 전 대통령도 백담사로 ‘유배’합니다. 그러나 여소야대는 90년 2월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3당이 합당해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키며 2년 만에 끝납니다.

14대 총선 후엔 넉달 동안 국회 문 못 열어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14대 총선(92년 3월 24일)을 3개월 앞두고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여의도 정가를 긴장시켰습니다. 선거 결과 통일국민당은 지역구 선거에서 31석을 획득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의 연기 문제를 놓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14대 국회는 임기가 개시된 지 125일이 지나도록 원 구성을 하지 못 하고 파행했습니다. 14대 총선에선 선거 과정에서 이지문 중위가 군 부재자 투표 과정에서 부정이 있었다고 양심선언을 했다가 파면을 당하는 일도 벌어지면서 부재자 투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게 됐습니다. 이 때문에 14대 대통령 선거에선 선거 사상 처음으로 부재자투표소 투표제도가 도입되기도 했습니다.

17대 총선부터 금품수수 시 50배 과태료 물게 돼

제17대 총선에 사용된 비례대표 선출을 위한 정당투표 용지(왼쪽)와 지역구 투표용지.

2004년 17대 총선은 불법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열린우리당의 창당, 대선자금 수사 등으로 정국이 몹시 어수선한 가운데 치러졌습니다. 당시 탄핵 역풍을 타고 열린우리당이 원내 152석을 확보하면서 12년 만에 정국이 ‘여소야대’에서 ‘여대야소’로 전환됐습니다.

복잡한 정치환경 속에 당시 총선에는 몇 가지 의미 있는 제도들이 도입됐습니다. 우선 국회의원 선거 사상 처음으로 지역구 투표와 정당별 비례대표 투표를 분리해 투표하는 ‘1인 2표제’가 도입됐습니다. 정당별 비례대표제는 정당별 전국 득표 비율에 따라 의석을 나누되 전국 득표율이 3% 이상이거나 지역구에서 5석 이상을 얻은 정당에 한해서만 자격을 부여하도록 했습니다. 금품수수 시 50배 과태료를 무는 제도 등도 도입됐습니다. 지구당이 폐지되고 합동 연설회와 정당 연설회 역시 없어졌습니다. 이때부터 돈 선거가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각각의 총선은 한국 정치에 의미 있는 숫자와 기록을 남기곤 했습니다. 선거는 진화합니다. 2012년 19대 총선이 끝나면 어떤 의미를 지닌 숫자가 남아 있을까요?

독자와 함께 만듭니다

뉴스클립은 시사뉴스를 바탕으로 만드는 지식 창고이자 상식 백과사전입니다. 뉴스와 관련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e-메일로 알려주십시오. 뉴스클립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newsclip@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