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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나마 고향땅 볼 수 있게 … 964구 주검들 북으로 누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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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호 10면

작은 봉분 앞에는 비석 대신 하얗게 칠한 비목을 세웠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경우 무명인이라 적고 곁에는 유해가 발견된 장소를 밝혀 뒀다. 파주=최정동 기자

올해도 어김없이 6월이 왔다 간다. 인적 뜸하던 현충원이 참배객의 발길로 부산해지는 것도, 젊을 때 이국의 전장에서 생지옥을 겪은 벽안의 참전용사들이 성성한 백발로 한국을 방문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한반도의 6월은 전쟁을 기억하고 반추하는 계절이다. 하지만 아무도 돌보거나 기억해 주지 않는,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주검들의 안식처가 이 땅의 한쪽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경기도 파주 37번 국도변 ‘적군 묘지’ 르포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답곡리 산55, 파주에서 연천 방향으로 이어지는 37번 국도변의 나지막한 언덕에 통칭 ‘적군 묘지’가 조성돼 있다. 한국전쟁 때 전사한 북한군이나 중공군의 유해를 안장해 둔 곳이다. 적군의 유해를 한곳에 묻고 관리하는 묘지로선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곳이라는 게 국방부 당국자의 설명이다. 이 당국자는 “민간이 아닌 정부가 이 묘지를 조성한 것은 제네바협약의 규정과 인도주의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이곳에는 북한군 709구, 중공군 255구 등 모두 964구의 유해가 묻혀 있다. 높이 1m가량의 각목을 하얗게 칠해 세운 비목에는 대부분 ‘무명인’이라고 적혀 있다. 신원을 확인할 길도 없고, 총부리를 겨누고 싸운 적군의 신원까지 굳이 확인해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비목 뒷면엔 발굴 장소가 적혀 있다. 낙동강 지구, 금양지구, 단양지구, 횡성지구, 다부동…. 한국전쟁 격전지의 지명과 그대로 일치한다. 축구장 2개 넓이의 묘지를 빼곡히 메운 봉분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산세 좋은 언덕을 등지고 햇살 다사로운 남쪽을 향하는 묏자리의 기본 원칙과 달리 이곳의 봉분들은 하나같이 북향이다. 군 당국자는 “죽어서나마 고향 땅을 바라보라는 배려로 북향을 택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5㎞ 거리다. 바로 코앞이 민간인 통제선이다.

파주 적군 묘지에는 한국전 전사자만 묻힌 게 아니다. 1968년 청와대 습격을 위해 침투한 1ㆍ21 사태 무장공비 가운데 김신조씨를 제외한 30명과 98년 남해안으로 침투했다가 사망한 공작원 6명도 여기 있다. 대부분 ‘무명인’이라 쓰인 비목 가운데 간혹 실명이 발견되는 경우다. 87년 대한항공 858기의 주범 김승일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당시 김현희와 함께 체포됐던 그는 독약 앰플을 깨물고 자살했다.

파주 적군 묘지가 현재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은 96년 7월이다. 대전·원통·양주 등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던 것을 한데 모은 것이다. 그사이 공식 명칭도 ‘북한군ㆍ중국군 묘지’로 바뀌었다. 처음 98기에 불과했던 유해는 현재 10배 가까이 늘어났다. 2000년 이후 국방부가 한국전 전사자 유해 발굴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치면서 아군은 물론 북한군이나 중공군의 유해도 함께 발굴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철원 인근 광덕산 발굴 현장에선 아군과 적군의 유해가 같은 참호에서 뒤엉긴 채 발견됐다. 원거리 사격전으로 시작된 전투가 나중에는 치열한 백병전으로 이어졌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유영승 소령은 “동족이 싸운 한국전쟁이라 유골의 인류학적 특성만으로 피아를 구별하기 어렵다”며 “피아 식별의 가장 유력한 증거는 유품”이라고 설명했다. 탄피·탄환·반합이나 필기구·라이터 등 개인 소지품이 나오면 유골의 방향과 과거 전투 상황 등을 종합해 판정한다. 가령 별이 새겨진 단추나 모장(모자에 붙이는 표식)이 발견된다면 북한군 아니면 중공군으로 판정된다. 그러나 ‘만에 하나’ 판정이 잘못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발굴되는 유골이 늘어나면서 적군 묘지의 모습도 차츰 변해 갔다. 당초 제1묘역만 있던 것을 더 늘려 제2묘역을 만들었다. 부지가 점점 좁아지자 봉분 크기도 차츰 줄여 최근 만들어진 것은 거의 평평해졌다. 원래는 모두 개별 매장이었으나 최근에는 합장이 많아졌다. 그래서 모두 964명의 유해가 묻혀 있지만 봉분 수는 520기다.

북한군이나 중공군의 유골이 발견되면 정전위원회를 통해 이를 통보한다. 하지만 북한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해 오고 있다. 무장공비의 경우는 침투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한국의 자작극으로 몰아붙이는 입장이라 송환받는 것 자체가 자가당착이다. 다만 96년 강릉 앞바다로 침투해 온 무장공비의 시신 24구는 받은 적이 있다. 당시 북한은 잠수함이 고장을 일으켜 남한 땅에 상륙한 승조원들을 우리 당국이 살해했다는 입장이었다.

송환이 이뤄지지 않기는 중공군 또한 마찬가지다. 한때 중공군 유해를 반환하면 한ㆍ중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란 견해가 제기된 적이 있다. 이를 검토했던 정부 당국자는 “중국에는 해외에서 숨진 사람들은 현지에 묻는 관습이 있어 유해 인도에 적극적 자세를 기대하기 힘들다”며 “한국전에서 전사한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모안영)의 묘가 북한 땅에 남아 있는 사례를 봐도 그렇다”고 말했다. 또 중국의 고위층 인사들이 방문했을 때 적군 묘지를 방문토록 하는 방안도 실현 가능성이 작다. 당시 중공군의 참전은 형식상 정부 차원의 참전이 아닌 의용군 형식이어서 선뜻 정부 차원에서 논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파주 적군 묘지는 현재 육군 25사단이 관리하고 있다. 최근 찾은 묘역은 대체로 관리가 잘 돼 있었다. 25사단 관계자는 “분기별로 한 차례씩 제초작업과 함께 유실된 떼를 교체하는 정도의 소규모 보수작업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하곤 일반인들이 찾는 발걸음이 없어 적막감이 감돈다. 파주시 등록 문화해설사인 한성희씨는 “이따금 누군가가 꽃을 놓고 간 것이 발견되곤 하지만 누가 어떤 연유로 찾아오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월남민 출신의 종군작가였던 구상(1919~2004) 시인은 ‘적군 묘지 앞에서’란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오호, 죽어서도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살아 돌아갔더라면 각자의 조국에서 무공훈장을 받았을지도 모를 젊은 넋들은 61년째 이름 없이 묻혀 있다. 죽은 자도 뛰어넘지 못할 만큼 분단의 벽은 여전히 높고 두텁다. 적군 묘지의 말없는 무덤들이 일깨워 주는 엄연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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