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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308> 우리역사 속 통합형 리더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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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계층·이념·지역·세대 갈등이 적지 않은 이 시대에 되새겨볼 만한 지혜를 우리 역사 속에서 찾아봤다. 사회통합위원회(위원장 송석구)와 경제·인문사회연구회(이사장 김세원) 공동 주최로 올 4월부터 진행 중인 기획물을 참조했다. ‘우리 역사 속의 사회통합’을 주제로 한 릴레이 강연 프로그램이다. 삼국통일기 원효대사의 화쟁(和諍) 철학, 고려 태조 왕건의 정치·사회 통합책,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문화 리더십을 살펴봤다. 사회통합은 특정 시대, 특정 공간에 국한되는 이슈가 아님을 새삼 확인한다.

배영대 기자

원효대사의 화쟁 사상

통합형 리더로 손꼽히는 3인. 삼국통일기 소통의 철학을 정립한 원효대사.

‘통합의 리더십’을 우리 역사 속에서 찾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원효대사(617∼686)다. 삼국시대 불교 이론을 정립한 종교인이자 한국 사상사에 큰 획을 그은 철학자다. 특히 ‘소통 혹은 통합 철학’의 원류로 손꼽힌다. 그의 철학은 ‘화쟁(和諍) 사상’이라 불린다. 원효는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이란 저서를 남겼다. 고려시대에 화쟁국사(和諍國師)로 추존됐다.

원효는 모든 논쟁을 조화시키는 통합의 원리로 화쟁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불교 이론으로 출발했지만 시대적 과제와 부합했다. 그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통일되는 시대를 살았다. 삼국이 통일된 직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회 구성원의 융합과 통합이었다. 원효는 당대의 핵심 과제를 화쟁이란 용어로 풀어냈고, 이후 화쟁은 한국 불교와 사상사의 핵심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삼국 공통의 종교였던 불교가 사회 통합에 크게 기여한 셈이다.

원효의 화쟁은 상반된 두 세계를 묘합(妙合)하는 원리다. 화쟁의 논리를 그는 ‘융이이불일(融二而不一)’이라고 불렀다. 상반돼 보이는 두 가지를 융합하되 하나로 획일화하지 않는 것이었다. 다양성의 조화다. 화쟁은 양자택일이나 변증법적 통일 논리와 다르다.

같고 다름(同異)에 관해 원효는 이렇게 말했다. “같다(同)고 하는 것이 다른 것(異)을 녹여 다 똑같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견(異見)을 가진 사람을 다 몰아낸 뒤에 같은 견해로 획일화하는 것이 화쟁이 아니라는 의미다. 화쟁 사상은 일방적으로 한 면만을 고집하거나 한 가지 입장만을 절대화하는 경향을 경계한다. 특정 입장을 절대화하는 경우를 두고 원효는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원효대사는 화쟁 철학을 구현하는 삶을 살았다. 그것은 경계의 벽을 넘는 모습이었다. 수행(修行)과 교학(敎學)에 매진하는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요석공주를 만나 환속해 소성거사(小性居士)를 자처하기도 했다. 출가 수행자와 환속한 거사의 모습을 모두 취한 것이다. 출가와 재가, 종교적인 삶과 세속적인 삶, 성(聖)과 속(俗) 그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해석된다.

원효의 가슴에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天柱)으로 자처할 만큼의 자긍심이 있었지만, 소성거사로 자처하는 데서 보듯 소승(小乘)의 가치도 중시했다. 그에게 대승(大乘)과 소승은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었다. 원효는 이렇게 말했다. “옷을 기울 때는 짧은 바늘이 필요하고, 긴 창이 있어도 그것은 소용없다. 비를 피할 때는 작은 우산이 필요하고, 온 하늘을 덮는 것이 있어도 소용없다. 그러므로 작다고 가벼이 볼 것이 아니다. 그 근성을 따라서는 크고 작은 것이 다 보배다.”

왕건의 사회통합정책

고려 창건 시기 정치·사회적 통합책을 선보인 태조 왕건.

후삼국 시대를 연 인물은 견훤과 궁예와 왕건(877∼943)이었다. 왕건이 가장 늦게 출발하였으나, 최종 승리는 왕건에게 돌아갔다. 왕건이 활약한 9세기 말부터 10세기에 이르는 기간은 군웅이 할거하던 지방분권적인 특징을 지닌다. 골품제 사회에서 문벌 귀족 중심 체제로 넘어가는 전환기였다. 신라 말 고려 초의 전환기 사회에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주인공은 중앙귀족이 아니라 지방 호족이었다. 대부분 스스로를 ‘성주(城主)’나 ‘장군(將軍)’이라고 칭하던 호족들은 자신의 지배영역에 살고 있던 농민과 유랑민을 규합해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 문제는 호족들을 자신과 가까운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왕건은 우선 왕위에 오르자 지방의 여러 호족들에게 사절을 보내어 귀중한 선물을 주고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이른바 ‘중폐비사(重幣卑謝)‘ 정책을 취했다. 낮은 자세의 외교를 통해 지방 호족들과 화친을 맺으려고 노력했다. 이를 흔히 ‘호족연합 정책’이라 부른다. 구체적으로는 결혼정책, 성(姓)을 하사하는 사성정책(賜姓政策) 등이 포함된다.

왕건은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을 맞이했는데 왕위에 오르기 전 만난 신혜왕후 유(柳)씨, 장화왕후 오(吳)씨를 제외한 나머지 왕비는 전국의 유력한 호족들 딸이었다. 왕건은 29명의 왕비로부터 25명의 왕자와 9명의 왕녀를 얻었고, 이복남매끼리의 근친혼까지 추진했다. 이 역시 호족연합을 위한 혼인으로, 왕실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왕건은 유력한 호족들에게 왕씨(王氏) 성을 하사해 유대를 강화했다. 강릉 지방의 유력한 호족이었던 순식이라는 인물이 오랫동안 왕건에게 불복하여 노심초사하게 하였는데, 그가 귀순해 오자 왕씨 성을 하사한 일이 대표적이다.

왕건이 즉위 초부터 친(親)신라 정책을 표명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경쟁자였던 궁예의 반(反)신라 정책과 대비된다. 왕건의 친신라 정책은 신라 영토 내에 있는 지방 호족을 고려 쪽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게 했다.

호족연합정책과 함께 중요한 것은 농민에 대한 시책이었다. 태조로 즉위한 바로 다음 날 조서를 내렸다. 궁예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고 폭정으로 백성을 괴롭혔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자신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백성의 조세부담을 줄이는 제도를 실시했다. 생산량의 10분의 1만 세금을 걷는 소위 ‘십일조(十一租)’가 그것이다. 또 태조 원년 8월에는 농민의 3년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고 전국에 사면령을 내려 유랑하는 백성이 농촌으로 돌아갈 수 있게 했다.

 
세종의 ‘문화 리더십’

조선 초기 문화 리더십을 발휘한 세종대왕.

1418년 22세의 나이로 조선왕조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 세종의 통치 시기는 문화적 황금기였다. 율곡 이이는 세종에 대해 “국가를 안정시켜 후손에게 잘살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며, 우리나라 만년의 기틀을 다져놓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세종의 한글 창제는 백성과 소통하려는 뜻에서 비롯됐다. 한글은 양반이나 지배층을 위한 글이 아니었다. 세종은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않아,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현실을 가엾게 여겼다. 아무리 좋은 정책을 베풀고 세제를 감면하고 농기구를 만들어도 한문을 모르는 농민들과 소통하기는 어려웠던 현실에서, 원활한 소통을 향한 길을 연 것이 한글 창제였다.

세종은 공론화 과정을 중시했다. 소통과 의견 수렴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시사(視事)·경연(經筵)·윤대(輪對) 등을 적절하게 활용했다. ‘시사’는 왕이 정부의 핵심 부서로부터 보고를 받고 결재하는 일이다. 시사를 통해 승지 등 측근과 협의하고 세세한 내용까지 직접 지시할 수 있었다. ‘경연’에서는 신하들과 정책 결정에 적용할 원리와 선례를 연구했다. ‘윤대’를 통해서는 하급관리들로부터 실무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공론 정치의 한 예를 여진족 정벌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압록강 상류 및 두만강 일대에 산재한 여진족과 조선인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이었다. 여진 정벌 논의는 세종 14년(1432)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3개월간 진행됐다. 정벌에 반대하거나 소극적인 신하의 의견도 수렴했다. 세종이 마지막 정책 결정을 내리기 전 항상 했던 “이렇게 결론을 내렸을 때 혹시 억울한 자가 없겠는가. 다시 한 번 찾아보자”고 한 말은 기억해 둘 만하다.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파격적 인재등용도 주목할 만하다. 천민 출신 장영실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귀화인의 후손으로서 어머니는 동래현 관기(官妓)였고, 장영실도 관노(官奴)였다고 전한다. 세종은 장영실의 신분이 낮지만 누구보다도 재주가 민첩한 것을 파악하고, 중국에 가서 과학지식을 습득할 수 있게 했다. 나아가 관직까지 내리고 연구에 전념케 했다. 장영실은 그의 재능을 알아준 세종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과학기술 성과를 잇따라 내놨다. 해가 비치지 않아도 시간을 알 수 있게 하는 자격루(自擊漏·물시계)를 비롯해 대·소간의(大·小簡儀), 혼천의(渾天儀) 같은 천문관측 기구를 만들어 냈다. 신분이 가장 낮은 여자 종들이 출산 전후 쉴 수 있도록 배려한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세종 8년(1426) 관비(官婢)에게 출산 후 100일의 휴가를 주도록 했고, 세종 12년(1430)에는 관비에게 출산 전 한 달의 휴가를 주도록 명했다.

※참고자료=사회통합위원회와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공동 주최 릴레이 강연 ‘우리 역사 속 사회통합’

원효의 화쟁사상 4월 27일 동국대 경주캠퍼스에서 열린 김상현 동국대 교수의 발표문 ‘삼국통일에서 사회통합을 읽다-원효의 화쟁사상을 중심으로’

왕건의 통합 정책 5월 20일 나주시 청소년수련관에서 열린 신호철 충북대 교수의 발표문 ‘고려의 건국과 왕건의 사회통합’

세종의 문화 리더십 6월 27일 오후 2시 서울 창덕궁에서 강연할 예정인 이배용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의 발표문 ‘세종의 문화리더십과 사회통합’

‘우리 역사 속 사회통합’ 강연은 올해 하반기에도 계속된다. ‘영조의 탕평과 사회통합’(7월·이은순 한국외국어대 교수), ‘신의와 소통의 상도:개성상인의 예’(9월·오성 세종대 교수), ‘국채보상운동’(10월·김상기 충남대 교수), ‘신간회와 민족주의자의 통합을 위한 열망’(11월·김호일 중앙대 교수) 등의 발표가 예정돼 있다. 문의 02-2180-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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