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연출로 인물들 내면 잡아낸 〈가을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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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의 전진 기지였던 영화 평론지 '카이에 뒤 시네마' 의 편집장을 역임한 에릭 로메르 감독의 1998년작. 봄(89).겨울(91).여름 이야기(96)에 이은 사계절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다.

'누벨바그 최후의 감독' 이라 불리는 만큼 〈가을 이야기〉에도 누벨바그적 특성이 강하게 녹아있다.

자연광을 그대로 사용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려는 '자연성' 과 언제나 스튜디오 대신 현장을 고집하고 촬영 도중에도 배우들과 끊임없이 토론하며 영화의 대부분을 즉흥적인 연출로 이어가는 '즉흥성' 이 그렇다.

여기에 사소한 이야기를 통해서도 '인생' 을 끌어내는 감독 특유의 관찰력이 가세한다. 〈가을 이야기〉의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다. 혼자 살고 있는 이웃에게 남자 친구를 소개하는 과정이 전부다. 짐작했겠지만 영화의 매력은 줄거리에 있지 않다. 오히려 등장 인물의 대사나 행동에서 드러나지 않는 심리적 표정을 예리하게 집어내는 데 있다.

실제 로메르 감독은 "사람들의 행동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행동을 하는 도중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찍고 싶다." 고 말한 적이 있다. 행동이 아니라 생각,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묘사한다는 뜻이다.

사람의 마음이 '우물' 이라면 이 영화는 '두레박' 이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등장 인물의 깊은 내면을 길어올리기 때문이다. 작품을 통해 느끼는 공감대의 폭과 깊이가 남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베네딕도 수도원 출시. 문의 02-2279-7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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