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경제학]5. 프리랜서 음악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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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과 활을 들고 유럽을 정복한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는 '19세기의 록스타' 였다. 1832년 콜레라가 유럽 전역을 휩쓸 때 그의 연주는 죽음의 공포마저 잊게 해주었다. 뭇여성과 염문을 뿌리면서 입방아에 오르고 '악마의 사제'라는 별명까지 얻어 죽어서도 오랫동안 교회묘지에 안장될 수 없었던 그는 비르투오소 연주자의 대명사로 통했다.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엘리사 바치오키를 모시던 궁정악장이었던 그가 프리랜서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1810년.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연주하겠다고 나섰다.

1828년부터는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 파리·런던·빈·함부르크·바르샤바 등 유럽무대를 휩쓸면서 부와 명예, 무엇보다도 자유를 만끽했다. 그의 이름을 붙인 레스토랑·요리·코담배 박스·큐(당구봉)도 등장했다.

처음엔 연주료를 도박에 탕진했다. 온종일 도박을 즐기다가 공연 직전에 무대로 향했다. 악기를 전당포에 맡긴 채 빈손으로 무대에 나타난 적도 있었다. 한 부자 아마추어가 바이올린을 빌려주었는데 그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나서 그 바이올린을 선물했다고 한다.

도박을 워낙 좋아해 1836년 파리에서 카지노를 열었지만 프랑스 정부로부터 도박장 허가를 받지 못해 개장 1년만에 10만프랑의 손해를 입었다. 그가 1회 공연으로 번 돈은 런던에서는 평균 7천파운드, 파리에선 1만2천프랑(약 5백 파운드). 바쁜 연주일정이었지만 매니저를 따로 두지 않았다. 아내 안토니아 비앙키와 아들 아킬리노가 가끔 도와줄 뿐이었다. 프로그램 만드는 것은 물론 공연장 예약·반주자 섭외도 손수 챙겼고 매표상황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악착같이 돈을 벌었지만 구두쇠는 아니었다. 부모 몫으로 2만리라의 연금을 들었다. 영국 순회공연을 도와준 파트너가 파산해 투옥됐을 때는 빚을 갚아주었고 그를 위해 자선공연도 열었다.

1838년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지휘하는 '이탈리아의 해롤드'를 듣고 나서 그에게 2만프랑을 선뜻 내놓았다. 베를리오즈는 빚 걱정 없이 '로미오와 줄리엣' 작곡에 몰두할 수 있었다. 프랑스 혁명정부가 그에게 위촉한 '레퀴엠'의 작품료는 3천프랑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사보·리허설·연주료까지 포함된 것이었다.

말년에 파가니니는 아들을 데리고 프랑스 남부에 가 악기상으로 변신했다. 그가 남긴 크레모나산 바이올린이 26대. 그중 스트라디바리는 7대, 과르네리는 4대였다. 아들에게는 3백만리라의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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