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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짜리 구멍 통해 웬만한 병 다 고치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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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2일 오후 4시, 서울 고대안암병원 중재시술실. 재활의학과 이상헌 교수가 디스크 환자인 이동규(45·서울 삼성동)씨에게 말을 건넨다. “아프지 않으시죠?” 누워 있는 이씨 등엔 주삿바늘 3개가 꽂혀 있다. “네, 괜찮습니다.” 셋 중 가장 굵은 바늘의 직경이 1.7㎜. 헌혈할 때 쓰는 주삿바늘 두께다. 그 사이로 1㎜의 가는 관(카테터)을 밀어 넣는다. 관은 척추에서 탈출해 주변 신경을 누르고 있는 디스크 부위까지 올라갔다.

 “삑! 삑!” 의사는 방사선투시기로 관의 위치를 여러 차례 확인한다. “이제 됐네요.” 이 교수가 손에 쥔 기구의 버튼을 누르자, 관 끝에서 열에너지를 발생하는 고주파가 나온다. 디스크 안의 수핵과 염증·신경 말단을 소작해 통증을 줄이는 시술이다. 이씨는 회사 업무가 바쁘다며 이날 밤 퇴원했다.

 시술 11일째인 3일 이씨는 “간단한 시술로 통증이 줄고 회복시간이 절약됐다”며 “시술 도 전혀 아프지 않아 신기했다”고 말했다.

일러스트=강일구

국소마취, 출혈 적어 고령자도 부담 없어

수술은 의료의 꽃이다. 피부를 절개하고, 환부를 드러내 치료한다. 이런 전통적인 수술법이 인터벤션(intervention), 즉 중재(仲裁)시술로 대체되고 있다. 내과와 외과를 넘나들며 중재한다는 뜻이다. 신촌세브란스병원 영상의학과 김만득 교수는 “영상장비를 이용해 칼 없이 수술과 동일한 효과를 내는 치료법”이라고 설명했다.

중재시술은 철저히 환자 중심이다. 환부를 크게 절개하지 않으니, 전신마취가 필요 없다. 국소마취만 하고 주삿바늘을 꽂거나, 3㎜ 이하의 작은 구멍을 내는 정도다. 출혈이 적어 수혈을 하지 않는다. 일상생활로 복귀가 빠르고, 고령이어도 시술이 가능하다. 입원기간이 짧고 일상복귀도 빠르다.

중재시술은 1960년 미국에서 82세 할머니의 막힌 다리 혈관을 뚫는 것으로 시작됐다. 발가락이 썩어 절단해야 했던 다리를 살려내면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주로 좁아진 뇌·눈·심장·자궁 혈관이나 식도·요도를 넓히거나 뚫는다. 척추 디스크와 암 치료에도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영상장비와 기구가 발달하면서 1년 새 없던 시술법이 생기고, 기존 시술은 합병증을 줄 이며 발전하고 있다.

과거에는 당뇨병 합병증으로 발이 괴사하면 하지를 절단해야 했다. 무릎아래 혈관은 1~3㎜로 가는데다 길이가 20㎝로 길어 접근이 어려웠다. 최근엔 실처럼 가는 관을 넣고 풍선처럼 부풀려 혈관을 확장하고 스텐트(그물망)를 넣어 1~2시간 만에 당뇨발을 간단히 살린다. 암환자에도 적극 활용되고 있다. 암덩어리에 주삿바늘이나 관을 꽂아 항암제나 방사선물질이 묻은 알갱이를 직접 쏟아 붓는다. 암세포를 공격하고 혈류를 막아 괴사시킨다. 수술과 시술을 동시에 진행하는 방법(하이브리드 인터벤션)도 나왔다.

대한혈관외과학회 권태원 이사장(서울아산병원)은 “환자들이 수술보다 고통이 적은 중재시술을 선호해 5년 내 대부분의 수술이 시술로 바뀔 것”이라고 예상했다. 대한인터벤션영상의학회 이도연 회장(신촌세브란스병원)은 “머지않아 절개 수술이 거의 사라지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합병증 줄이고 치료 효과 높이고

중재시술이 발전하면서 치료원칙도 바뀌고 있다. 기존엔 무조건 수술을 했지만 이젠 중재시술이 가능한 지 먼저 고려하고 안 되면 수술한다. 대동맥류를 예로 들어보자. 심장과 직접 연결돼 온몸에 혈액을 공급하는 굵은 동맥이 동맥경화로 약해져 늘어나다가 파열하는 질환이다. 과거에는 늘어난 대동맥을 인조혈관으로 바꾸려고 가슴부터 배까지 50㎝ 가량 절개했다. 중환자실을 거쳐 10일간 입원했다. 하지만 중재시술을 받으면 3일 만에 퇴원한다.

 대동맥류의 경우, 미국은 2005년부터 중재시술이 수술을 앞섰다. 우리나라도 2005년 대동맥류 스텐트(그물망) 그라프트 시술을 보험으로 인정하면서 시술 건수가 급격히 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흉부 대동맥류로 수술받은 환자는 2006년 882명에서 2010년 1411명으로 1.6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대동맥류로 중재시술을 받은 환자는 105명에서 672명으로 6.4배 증가했다. 말초대동맥류 질환은 같은 기간 수술환자가 1331명에서 1717명으로 정체를 보인데 반해, 시술환자는 3147명에서 6443명으로 2배 증가했다.

한국 의료진, 기술·도구개발 세계적 수준

한국 중재시술은 세계적 수준이다. 발표된 논문 수와 영향력을 따졌을 때 미국·독일·일본 등과 함께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우리나라엔 세계 의학계를 쥐고 흔드는 대가들이 있다.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박승정 심장병원장은 심장혈관에 하는 스텐트술로 세계 심장병 치료 기준을 재정립하고 있다. 혈관에 쓰는 스텐트를 소화기질환에 처음 도입한 것도 한국 의사다. 그 때문에 소화기인터벤션의학회는 국제학회임에도 매년 한국에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중재시술에 쓰는 기구를 직접 개발해 세계로 수출하는 의사도 많다.

한국 중재시술을 배우러 매년 2월 50여 명의 의사가 중국·타이완·미국·이탈리아 등에서 모여든다. 대한인터벤션영상의학회에서 여는 훈련코스로 올해로 9회를 넘었다.

이주연 기자
일러스트=강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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