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이 외면한 '한국판 베토벤', 日오리콘차트 휩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사춘기를 앓던 열다섯 살 중학생 소년에게 어느 날 강박증이 찾아왔다. 무언가 머릿속에 자꾸만 떠올라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고 특정 행동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 견딜 수 없는 강박증.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고 친구들과도 어울리기 힘들었다. 친구들은 소년을 '이상한 아이'라며 따돌렸다. 선생님들도 소년에게 무관심했다. 외로운 '왕따' 소년에게 유일한 친구는 음악이었다.

청년이 된 그는 군악대에 들어갔다. 구속이 심했지만 매일 음악과 함께 할 수 있어 좋았다. 제대할 즈음 불행은 또 찾아왔다. 종일 시끄러운 소리에 노출되다보니 귀의 신경이 예민해져 청각과민증을 앓게 된 것.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소리, 시계 초침 소리 조차 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유발했다. 귀지를 팔 때 느끼는 아픔의 배였다. 반년을 꼬박 누워지내다 증세가 차츰 호전되자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음악을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뒤. 그가 작곡한 노래가 일본 오리콘차트에서 일간차트 1위를 기록했다.

‘사랑,주세요(愛, チュセヨ)’를 작곡한 신영섭씨

인간 승리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부산외대 비즈니스일본어학과에 재학중인 신영섭(29)씨다. 신씨의 노래는 일본 인기 여성 그룹 'SDN48'의 새 앨범 타이틀곡 ‘사랑,주세요(愛, チュセヨ)’로 만들어져 이달 6일 오리콘차트 일간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신씨의 원곡에 템포만 조금 빨라졌다. 'SDN48'은 우리나라의 '소녀시대'를 연상케하는 인기 여성 걸그룹이다. 일본 가요계에선 "무명의 한국 청년이 일본 가요계를 뒤흔들었다"며 놀라워했다.

“특별히 일본 대중 음악 정서를 염두에 두고 작곡한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한참 청각과민증을 앓던 시절에 느꼈던 감정, ‘밝게 생활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랑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표현한 거에요." 그래서인지 노래가 매우 경쾌하다. 단순한 멜로디가 반복돼 따라 부르기도 쉽다.

"청각과민증으로 집에서 누워만 지내다 보니 우울증이 찾아왔어요.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 나네요. 하지만 지난 날의 아픔이 저를 더욱 성숙하게 해줬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를 괴롭혔던 사람들에게도 조금이나마 고마운 마음이 들어요. 음악을 알게 해줬으니까요."

신영섭씨가 작곡한 ‘사랑,주세요(愛, チュセヨ)’가 日 오리콘 일간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병세가 호전될 무렵이던 2009년 신씨는 일인 밴드 'AM시크릿'을 만들어 활동했다. 지난해 초 싱글 음반을 내고 국내 기획사에 수 차례 문을 두드렸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그러다 지난 연말 '매직 원 코퍼레이션'이란 일본 음반기획사가 한국인 작곡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응모했고 결과가 '오리콘 차트 1위'라는 대박을 안겨다줬다.

“저 같은 신인 작곡가에겐 아주 좋은 기회였습니다. '카라'와 '소녀시대' 등 요즘 더욱 뜨거워진 일본 내 한류 열풍 덕을 본 것도 있겠지요." 자신을 내 친 한국 음반시장을 그는 그렇게 감쌌다.

신영섭씨가 작업실에서 작곡에 몰두하고 있다.


신씨는 아직 SDN48을 만나본 적이 없다. 작곡비도 추후 정산 받을 예정이다.

그래도 무명의 한국인이 일본 가요계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네티즌들은 ‘청각과민증을 극복한 한국판 베토벤’이라며 환호했다.

그가 앓고 있는 청각과민증은 언제 치유될 지 모른다. "지금도 귀가 아파서 음악을 자주 듣지는 못 해요. 작곡가로선 치명적이죠. 하지만 이를 악물고 음악을 계속할 겁니다. 힘든 시절 저를 일으켜줬고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줬으니 평생 함께 해야할지도 모르죠."

김진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