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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럼] 새천년 'e폭풍'

중앙일보

입력

숫자 제로는 마감인 동시에 시작이다.
무(無)로 돌아감을 뜻하면서도 새로움을 잉태한다.

2000년이 지나간 천년대의 마감이냐, 새 천년의 시작이냐는 논란이 결론을 유보한 가운데 2000의 팡파르는 이미 울렸다.
기술적으로 법률적으로 21세기와 뉴 밀레니엄은 아직 1년이 남았다고 한다.
상업주의의 작위(作爲)든, 아니든 당장 우리들에게 소중한 것은 그 줄줄이 달린 제로의 의미다.

제로는 공(空)을 뜻하는 인도어 '순야(sunya)' 에서 유래한다.
만물이 태어나는 원천이자 만물이 되돌아가는 심오한 범어 개념이다.
마야문명에서 제로는 생명이 창조되는 원천이었다.

이들에게 시간은 일직선의 무한한 연장이 아닌, 순환이었다.
따라서 제로는 한 사이클의 시작이자 완결이다.
달력에 날짜는 1부터가 아닌 영(零)부터 시작했다.
첫번째는 0번째, 우리의 주택청약순위에서 1순위보다 앞선 '0순위' 개념이 절묘하다.

물리학에서 진공(眞空)은 세계를 이해하는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그럼에도 크리스천 캘린더에서 0년은 실종됐다.
기원전(BC)1년과 기원(AD)1년 사이, 즉 마이너스 1과 플러스 1 사이에 0이 빠진 것이다.
하기야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 태어난 때가 AD 1년이 아닌 BC 4년께라니 혼돈은 더한다.

뒤늦게 '0년' 을 추가하는 시도들도 따지고 보면 원년으로서의 '0' 에 대한 애착 때문이리라.
2000의 상징은 '다가오는 큰 것' (Next Big Thing)이다.
정보지식혁명은 우리의 삶과 사고방식.행동양식.가치관 문화까지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다.
전자의 'e' (electronics)로 시작되는 'e' 자돌림의 신천지다.
e-상거래, e-비즈니스, e-기업, e-금융, e-출판, e-교육, e-문화, 심지어 e-정치에 이르기까지 'e' 혁명이 진행 중이다.

세계문명사를 빌 게이츠 이전(BG)과 이후(AG)로, 또는 인터넷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새로운 분류법마저 고개를 든다.
'다음 큰 것' 을 앞두고 '사이버황야' 에서 용틀임이 시작된 2000이야말로 'e' 혁명의 원년으로 손색이 없다.

세계 최우량기업 GE(제너럴 일렉트릭)가 'e-기업' 으로 또 한발짝 앞서가기 위해 사내 인터넷주소를 아예 'destroyyourbusiness.com)으로 내걸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을 모두 때려부수고 새로이 판을 짜라는 주문이다.

'e' 비즈니스를 단순한 인터넷 쇼핑이나 틈새시장을 노린 전자상거래로만 착각함은 큰 오산이다.
'e' 비즈니스 기법은 제품의 디자인에서 생산-인도-판매-재고관리-고객취향파악은 물론이고 기업하는 방식과 경영 전반에 근본적인 변혁을 몰아온다.

고객 및 부품공급자들과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 그것도 빛의 속도로 맺어준다.
비즈니스간.산업간 경계도 급속히 허물어지면서 사회 각급 조직이 'e' 조직으로 거듭나고 있다.

'e' 혁명의 속도 또한 수학의 제곱(exponential)으로 'e' 자 돌림이다.
규모와 기존 관행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과정을 서둘러 밟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그럼에도 'e' 비즈니스에 접하고 있는 우리 기업들은 전체의 10%도 채 안된다.
"한국 경제의 앞날은 e-비즈니스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 는 인텔의 최고경영자 크레이그 배럿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핀란드는 인터넷을 통한 정보화로 불과 4년만에 국가경쟁력 3위의 최첨단산업국으로 올라섰다.
싱가포르는 '테크노프레뇌십' 이란 구호 아래 'e' 기업화를 뒷받침하고 나섰다.
이스라엘이 '지중해 연안의 하이테크 메카' 로, 인도가 소프트웨어의 글로벌 센터로 여타 후발국들의 모델로 떠오른 지 오래다.

'제조업의 왕국' 일본의 자긍심이 '아시아의 인터넷 황제' 손정의(孫正義)앞에 무릎을 꿇고, '마르크 강국' 독일도 'Das Netz' (인터넷)를 자조하며 뒤늦게 'e' 비즈니스 따라잡기에 나섰다.

'e' 혁명의 핵심은 새로운 가치창출이다.
인터넷은 그 도구다.
새로운 발상과 조직문화로 개인과 직장과 사회와 국가가 지식정보화로 한 덩어리가 될 때 힘과 경쟁력을 발휘한다.

인터넷경제는 다차원의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승수(乘數)효과로 뻗어난다.
미국 나스닥과 우리 코스닥의 인터넷 주가 '광란' 은 뭘 말하는가.

우리 사회는 어느 부문 할 것 없이 기득권과 '과거' 에 매달려 왔다.
자동차운전에 비유하면 백미러만 보면서 지그재그 운전을 해 온 격이다.
초고속으로 질주하는 지식정보고속도로에서 뒤를 돌아다볼 겨를이 없다.
사회 각급 조직과 구성원들이 묵은 틀을 부수고 'e' 조직과 'e' 문화, 'e' 경영과 'e' 정치로 거듭 태어나는 새해, 그런 의미에서 2000년을 한국 재도약의 원년으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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