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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중국 도시이야기 (6) 문향(文香)의 도시 항저우(杭州)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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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중국 청(淸)나라 때의 소설 『재생연(再生緣)』과 우리에게도 익숙한 중국의 민간전설 『백사전(白蛇傳)』은 항저우와 관계가 깊다. 『재생연』의 여류작가 진단생(陳端生·1751~1796)의 고택이 항저우 서호(西湖) 동쪽 호반에 자리 잡은 구산초사(句山樵舍)다. 『백사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뇌봉탑(雷峰塔)에 깃들어 있다. 문학의 도시 항저우로 떠나보자.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천하의 시인 백거이·소동파, 천하절경 서호에 제방 쌓고 시를 남기다

『홍루몽』에 버금가는 『재생연』작가의 고향

항저우의 유명관광지 서호의 제방 백제(白堤)가 봄을 맞았다. 길 양편에 심어진 버드나무에 물이 올라 연두빛의 나무가지가 하늘거리는 가운데 수 많은 관광객들이 산책을 하며 봄을 즐기고 있다. [항저우 신화사=연합뉴스]



『재생연』은 요즘으로 치면 판타지 로맨스 소설이다. 저승에 간 부부가 옥황상제에게 이승에서 못다 이룬 사랑을 호소한다. 상제는 남자를 황보소화로, 여자를 맹려군(孟麗君)으로 태어나게 한다. 시대 배경은 송(宋)에서 원(元)나라로 넘어갈 때로 고려(소설에서는 조선)가 중국을 공격하는 상황이 설정된다. 황보소화는 고려를 무찌른 공으로 충효왕에 봉해지고, 맹려군은 남장을 한 뒤 장원 급제해 승상의 자리까지 오른다. 우여곡절 끝에 소화와 려군이 부부가 된다는 이 소설은 한국으로 건너와 『재생연전』이란 제목으로 국역된다. 규방의 여인들 사이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또 『숙영낭자전』이라는 번안소설로 각색돼 오늘에 전한다.

여류작가 진단생이 『재생연』 전반부를 쓴 것은 20세 때였다. 말년에 눈이 먼 국학대사(國學大師) 천인커(陳寅恪·진인각·1890~1969)는 여조교가 읽어주는 소설 『재생연』을 듣고 진단생의 인생에 매료된다. 이후 석 달 만에 『논재생연』을 써내려갔다. 궈모뤄(郭沫若·곽말약·1892~1978)도 진단생은 ‘확실히 천재적인 작가’이며 ‘남연북몽(南緣北夢, 남방의 『재생연』, 북방의 『홍루몽』)’이라며 『홍루몽』에 비견할 만한 작품으로 평가했다. 궈모뤄는 1961년 진단생이 태어난 항저우의 구산초사 유적지를 찾아 ‘초사는 구산에 여전히 있지만 그 사람은 다시 만날 길이 없도다(樵舍勾山在, 伊人不可逢)’라는 시를 지었다. 방치되던 구산초사는 아쉽게도 지난해 화재로 소실됐다. 『재생연』은 ‘맹려군’이란 제목으로 각색돼 경극과 영화, 드라마로 큰 인기를 끌었다.

밸런타인데이에 연인들이 찾는 사랑의 도시

장이머우 감독이 총연출을 맡은 수상공연인 ‘인상서호’의 한장면. 전통 설화 『백사전』에 현대적 무대 장치와 음악을 덧입혔다. 호수면 자체를 무대로 잡아 배우들이 물 위를 걸어다니며 공연을 펼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중앙포토]

항저우는 사랑의 도시다. 애절한 러브스토리의 고향이다. 백미는 『백사전』이다. 백사는 항저우 서호 속에서 500년 동안 수행한 끝에 여자가 된다. 이름은 백소정(白素貞), 순결한 백옥의 여인이란 뜻이다. 그녀 곁에는 푸른 뱀에서 변신한 소청(小靑)이라는 하녀가 있다. 백소정은 서호의 단교(斷橋)에서 놀러 나온 서생 허선(許仙)을 처음 만난다. 마침 비가 내리고, 허선이 미모의 백소정에게 우산을 빌려주면서 사랑이 싹튼다. 백소정은 우산을 돌려주겠다며 허선의 거처를 묻는다. 둘은 사랑을 이뤄 결혼까지 이른다. 이때 고스트버스터 격인 법해선사(法海禪師)가 등장해 허선에게 부인의 정체를 알려준다. 허선은 단오절에 아내 백소정에게 법해선사가 준 약이 든 술을 권한다. 허선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던 백소정은 숨겨온 정체가 드러난다. 아내의 실체를 목격한 허선은 기절해 숨을 거둔다. 백소정은 목숨을 걸고 신선초를 구해와 남편을 살려낸다. 되살아난 허선은 고민에 빠지고, 법해는 그를 금산사로 데려간다. 남편을 찾으려는 백소정은 법해와 무공 대결을 펼치나 패하고 만다. 출산이 임박한 백소정은 서호 단교에서 허선을 다시 만나 그의 배신을 원망한다. 이때 법해가 다시 나타나 법력으로 백소정을 뱀으로 돌려놓은 뒤 뇌봉탑 아래에 가둬버린다. 백소정과 허선의 사랑은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인 『양산백(梁山伯)과 축영대(祝英台)』의 배경도 항저우 서호다. 축영대는 귀족 가문의 말괄량이다. 그녀의 부모는 축영대를 시집 보내기 위해 남자로 변장시켜 서원에 입학시킨다. 축영대는 서원에서 양산백을 만나 함께 공부한다. 부모의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은 축영대가 떠나게 되자 양산백은 그제야 축영대가 여자임을 깨닫고는 미래를 약속한다. 하지만 축영대는 부모의 뜻대로 다른 귀족 집안에 출가하게 되고 이를 안 양산백은 상심해 병으로 죽는다. 혼례길에 연인의 죽음을 알게 된 축영대는 양산백의 무덤을 찾는다. 이때 양산백의 무덤이 갈라지고, 축영대는 무덤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둘의 영혼은 나비가 되어 결국 사랑을 이룬다. 이들이 만난 곳이 항저우의 만송서원(萬松書院)이고, 헤어진 곳이 서호 동남변의 장교(長橋)다. 양산백과 축영대 커플이 차마 헤어지지 못해 서로 배웅하기를 열여덟 번 반복했다는 곳이다. 지금도 중국의 선남선녀들은 밸런타인데이에 이곳을 찾는다. 사랑의 도시 항저우의 아이콘인 셈이다.

오늘날 항저우 관광객의 필수 코스는 ‘인상서호(印象西湖)’ 관람이다. ‘항저우에 와서 서호를 보지 않으면 능히 항저우에 왔다고 할 수 없고, 서호를 보고 ‘인상서호’를 보지 않으면 서호를 봤다고 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을 총연출한 영화감독 장이머우(張藝謀·장예모)가 2008년부터 시작한 초대형 수상 버라이어티쇼다. 『백사전』을 모티브로 서호를 무대로 만남(相見)-사랑(相愛)-이별(離別)-추억(追憶)-인상(印象) 다섯 챕터로 펼쳐지는 사랑의 세레나데는 매일 밤 한두 차례씩 펼쳐진다.

미녀 서시와 견줄 만큼 아름다운 호수

항저우 서호의 전경. [중앙포토]

서호에는 세 개의 제방이 있다. 백제(白堤)와 소제(蘇堤), 그리고 소제를 증축한 양공제(楊公堤)가 호수를 가른다. 백제는 당(唐)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읊은 ‘장한가(長恨歌)’를 지은 백거이(白居易·772~846)가 항저우 자사로 부임해 축성했다고 전하지만 근거는 빈약하다. 백제에 놓인 아치형 다리 단교에 눈이 쌓인 ‘단교잔설(斷橋殘雪)’은 서호10경 중 하나다. 백거이는 각별한 아내 사랑으로도 유명하다. 아내 양씨에게 바친 ‘증내(贈內)’는 소박하고 행복한 삶을 그리며 청렴한 관료로 살겠다는 다짐과 안빈낙도의 가치관이 어우러진 시다. 항저우에서 백거이는 ‘푸른 버드나무 그늘 아래 백사장 둑길(綠楊蔭里白沙堤)’이란 시구가 들어간 ‘전당호춘행(錢塘湖春行)’을 지었다. 사랑의 시인 백거이는 수양버들 하늘거리는 서호에서 시를 읊조리며 산책하기를 즐겼다.

소제는 송나라의 문인 소동파(蘇東坡·1037~1101)가 쌓았다. ‘출렁이는 물빛이라 맑은 날이 좋더니, 산색이 자욱한 게 비 또한 기이하다. 서호를 서시와 비교하면, 옅은 화장 짙은 분이라 하면 서로 맞겠네(水光瀲艶晴方好, 山色空濛雨亦奇. 欲把西湖比西子, 濃粧淡抹悤相宜)’라고 노래한 ‘서호에서 술 마시는데 비가 내리다(吟湖上初晴後雨)’라는 시는 서호를 묘사한 대표적인 시다. 서호라는 이름이 서쪽의 호수가 아닌 미인 서시(西施)와 견줄 만큼 아름다워서 붙었다는 설은 이때부터 정설이 됐다. 봄날 아침녘 자욱한 안갯속에서 버드나무 가지 날리는 ‘소제춘효(蘇堤春曉)’는 서호10경의 첫째로 친다.

상업의 성인 호설암 … 쭝칭허우·마윈이 뒤잇다

서호 남쪽의 뇌봉탑(雷峰塔). 이 탑을 배경으로 독사진을 찍거나 탑모형을 아내 사진 위에 올려 놓으면 공처가 신세를 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중앙포토]

항저우에는 ‘상성(商聖)’으로 불리는 호설암(胡雪巖·1823~1885)의 옛집이 남아 있다. 호설암은 청(淸)말 절강순무 왕유령(王有齡), 민절총독 좌종당(左宗棠)과의 각별한 ‘관시(關係)’를 이용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태평천국의 난 속에서 금융업과 무역업을 독점했다. 양곡과 군수물자를 관장하는 정부 요직까지 맡아 ‘홍정상인(紅頂商人)’이라 불렸다. 요즘으로 치면 장관 겸 기업CEO였던 셈이다. 그의 항저우 집은 당시 강남 제일의 호화저택으로 사치의 극치를 보였다.

항저우가 중심 도시인 저장(浙江)성은 민영기업의 요람이자 천국이다. 중국 드링크 시장의 1위 업체인 와하하(娃哈哈)의 쭝칭허우(宗慶後·종경후·66) 회장, 전자상거래의 강자 알리바바 마윈(馬雲·마운·47) 회장은 호설암의 대표적인 후예들이다. 2010년 중국 500대 민영기업 중 171곳이 저장성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민영기업 서밋(정상회의)은 항저우에서 해마다 열린다.

항저우는 차기 중국 최고지도자로 유력한 시진핑(習近平·습근평·58) 국가부주석이 일했던 곳이기도 하다. 시 부주석은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저장성 당서기로 근무했다. 평안(平安)·법치(法治)·녹색저장(綠色浙江)을 모토로, 연평균 14%의 GDP 성장을 이뤘다. 시 부주석은 이 실적을 기반으로 이후 상하이 당서기를 거쳐 2008년 공산당 상무위원회에 진입했다.

시 부주석은 저장성 당서기 시절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청사의 복원을 승인했다. 2007년 서호변에 복원된 임정 청사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1932년부터 1935년까지 머물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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