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봉투를 든 전직 대통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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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호 35면

조지 W 부시는 2001년부터 8년간 미국 대통령이었다. 집권 초기 9·11테러로 미국 본토가 공격당하자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붙잡아 처형하고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켰다. 그에 대한 세계의 시선은 싸늘한 편이었다. 2008년 바그다드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중 이라크 기자가 그에게 신발을 벗어 던졌다. 퇴임을 전후해서는 미국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란 평가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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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최근 방한했다. 자서전 『결정의 순간(Decision points)』 한국어판 출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비공식 방문이다. 재임 중 미국을 방문했던 이명박 대통령을 만났지만 나머지 일정은 대부분 책과 관련된 것이었다. 서울 장충동 반얀트리 클럽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고 진해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했다(사진). 대부분의 한국 언론은 그의 일정을 간략하게 처리했다.

미국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하다. 제정 로마의 황제와 유사하다. 의회의 동의가 없어도 전쟁을 개시할 수 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전 세계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 세계 정상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사진을 찍을 때는 항상 가운데를 차지한다. 백악관의 애완견이 바뀌어도 카메라가 쫓아다닌다.

하지만 퇴임하고 나면 세상의 시선에서 사라진다. 신문과 방송의 카메라도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대신 신임 대통령이 온 세상의 축하와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새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부시가 고향 텍사스로 내려갔을 때 아내 로라는 “이제 마음껏 설거지하라”고 농담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관심 밖으로 밀려난 상황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퇴임 직후 이웃이 목격한 부시는 애견 바니의 배설물 봉투를 든 모습이었다. 재미있지만 상징적 장면이다.

전 세계를 호령하던 최고의 권력자가 어느 순간, 쓰레기봉투를 든 평범한 가장으로 돌아간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가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장면 아닌가. 거대 권력의 평화적 이양. 일반인으로 돌아간 권력자. 사진기자로서는 그런 생각이 든다.

한국은 미국식 대통령제를 가장 충실하게 받아들인 나라다. 그러나 법 조문만 가져온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다. 특히 전직 대통령들의 처신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직들이 정치 현안에 대해 거친 언급을 하며 강퍅한 정치 현실을 더욱 거칠게 만든 사례가 있다. 전직은 할 말이 남았더라도 마이크를 잡지 않는 게 미국 대통령제의 불문의 전통이다. 동시에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들을 예우하고 존경하는 것도 배워야 한다. 언젠가 내가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오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면 한국은 지금보다 훨씬 격조 높은 국가가 돼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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