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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조원 굴리는 광주일고‘경북대 3인방’은 자문사 주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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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호 22면

‘케빈 베이컨 게임’을 들어봤는지. ‘여섯 다리만 건너면 지구 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이’라는 서양의 통념을 반영한 놀이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어떤 영화든지 출연한 배우들을 연결해 가다 보면 여섯 번째 영화 이전에는 반드시 케빈 베이컨이라는 배우가 출연한 영화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60억 인구, 세상이 넓은 듯하지만 여섯 다리만 거치면 다 아는 좁은 곳이라는 의미다.

자본시장을 주무르는 학맥(學脈) 분석

한국에서는 어떨까. 조사를 했더니 3.6명만 거치면 다 아는 사이라고 한다. 연(緣)과 맥(脈)을 분석하는 건 한국 사회를 해석하는 데 의미가 있다. 돈을 다루는 자본시장에서도 그렇다. 중앙SUNDAY는 국내 자본시장을 주무르는 학연을 알아봤다. 공모 기준으로 국내 주식형 펀드 설정액이 1000억원 이상인 34개 자산운용사의 회장 및 대표(CEO), 총투자책임자(CIO)와 주식운용본부장(소규모 운용사의 경우엔 팀장) 등 92명, 그리고 주요 투자자문사 대표 24명 등 총 116명이 분석 대상이다.

SKY 득세 속 부산대 등 지방대 약진
증시에서 걸출한 인물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고등학교는 광주제일고다. 굵직한 자산운용사를 이끄는 수장들의 산실이다. 국내 펀드 시장을 개척한 주역인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은 이 학교 1977년(52회) 졸업생이다. 동기로 송상종 피데스투자자문 대표, 장인환 KTB자산운용 사장 등이 있다. 이들은 예전부터 ‘광주일고 3인방’으로 통했다. 현재 자산운용업계의 광주일고 맏형은 김영재 칸서스자산운용 회장(41회)이다. 금융감독원 부원장보를 지냈다. 그 외 정찬형 한국투신운용 사장(50회), 박래신 한국밸류자산운용 사장(50회) 등도 이곳을 나왔다.

이들이 굴리는 국내 주식형 펀드(공모 기준)는 27조5000억원을 웃돈다. 전체 공모 기준 국내 주식형 펀드 규모(58조4000억원)의 절반에 가까운 돈을 광주일고 출신들이 맡고 있는 셈이다.
광주일고는 1920년에 개교했다. 전남을 대표하는 명문학교로 꼽혔다. 그런데 다른 지역의 명문고에 비해 유독 이 학교 출신들이 자산운용 업계에 많은 이유는 뭘까. 정찬형 사장은 “예전에는 여건상 광주일고 출신이 관가나 대기업, 은행으로 진출해 성공하기는 쉽지 않았다”며 “출신 지역보다는 능력과 실력으로 인정받는 자산운용 업계에 진출한 이들이 많은 것 같다”고 평했다. 그는 이어 “비슷한 맥락에서 750여 명의 동기생들 가운데 150명 정도는 의사가 됐다”고 덧붙였다.

대학 가운데는 서울대 출신이 많았다. 34개 자산운용사 회장이나 대표들 37명 가운데 11명이 서울대 출신이다. CIO나 주식운용본부장들 55명 가운데도 20명이 서울대를 졸업했다. 흔히 펀드매니저는 연세대 출신이 많다고 하지만 CIO나 주식운용본부장 가운데 연세대 출신은 6명에 불과했다. 고려대 졸업생이 9명으로 더 많았다.

그러나 투자자문사 대표들은 연세대 출신이 많았다. 8명이다. 서재형 한국창의투자자문 대표, 박관종 프렌드투자자문 대표 등이 있다. 특히 연세대 경영학과 83학번의 진출이 눈에 띄었다. 구재상 미래에셋자산운용 부회장을 비롯해 서재형 대표, 이병익 오크우드투자자문 대표, 강선식 우리자산운용 주식운용본부장이 연세대 경영학과 83학번 동기다. 국민은행 주식운용팀에서 일하고 있던 서 대표를 미래에셋자산운용으로 스카우트한 사람이 구 부회장이다.

업계에 소위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지방대 중에선 경북대와 부산대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특히 투자자문사를 이끄는 ‘경북대 3인방’에 시선이 모인다. 박건영 브레인투자자문 대표, 권남학 케이원투자자문 대표, 김택동 레이크투자자문 대표 등이다. 이들 3개 투자자문사는 자금 모집과 수익률에서 자문사들 가운데 수위를 다투고 있다. 부산대 출신은 주요 자산운용사에서 펀드 운용의 실무를 맡고 있다. 이승준(42) 미래에셋자산운용 주식운용1본부장, 남동준(45) 삼성자산운용 주식운용2본부장, 김성복(42) JP모간자산운용 주식운용담당 상무 등은 부산대 경제학과 선후배 사이다.

학연이 자금 운용에 영향을 미쳤을까. 광주일고 출신 한 업계 관계자는 “아무래도 동가홍상(同價紅裳,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아니냐”고 말했다. 실력이 비슷하다면 아무래도 학연이 있는 선후배를 밀어주기 마련이고, 서로 도움을 주다 보면 운용 성과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느냐는 논리다. 펀드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2007년에는 ‘전날 밤 연세대 출신 매니저들이 모여 특정 종목을 밀어올리기로 모의하면 다음 날 정말 그 종목이 올랐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연세대 출신 한 펀드매니저는 “근거 없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그는 “동기끼리 만나도 주식 얘기는 절대 안 한다”며 “컴플라이언스(운용에 대한 법적·윤리적 규준)도 있고, 서로 자존심이 센 사람들이라 주가 전망이나 수익률 비교는 잘 안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이 대학 출신 펀드매니저는 “시장이 너무 과열됐을 때는 괜한 오해를 살까 봐 학교 모임에도 안 나갔다”고 말했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학연보다는 과거 어느 운용사 출신인지, 어느 선배 밑에서 배웠는지 등이 운용 스타일을 좌우한다”고 분석했다. 과거 대한투신 출신인지 한국투신 출신인지, 혹은 증권사에서 주식에 투자했는지 보험사에서 운용을 시작했는지 등이 자금 운용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그는 다만 “아무래도 서로 어울리는 경우가 많아 간접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운용 스타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자산운용사 81학번, 주식운용본부 87학번
자산운용사 대표들 가운데는 81학번이 많다.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사장은 서강대 경제학과, 조재민 KB자산운용 사장은 서울대 경영학과, 유승록 하이자산운용 사장은 고려대 경영학과 81학번이다. 현장에서 뛰고 있는 CIO와 주식운용본부장들은 87학번이 대세다. 박관종 대표와 김태우 피델리티자산운용 한국주식투자부문 대표는 연세대 경영학과 87학번 동기다. 이승준 본부장은 부산대 경제학과, 김경섭 한국투신운용 주식운용팀장은 서강대 경제학과 87학번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코스피 지수가 1000을 돌파하던 88년과 94년 전후 증권사나 투신사는 최고의 직장이었다”며 “그때 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인재들이 자본시장으로 들어와 지금 업계의 주축이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연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모든 직장을 비롯한 사회 각 분야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연령층이 40대 중반이다. 펀드매니저도 다를 바 없다. 이달 초 기준으로 금융투자협회에 운용전문인력(펀드매니저)으로 등록한 595명 가운데 출생연도를 밝힌 587명의 평균 나이는 38세다. 66~75년생이 359명으로 전체의 60%를 웃돌았다.

386이 장악한 펀드 시장에서 눈에 띄는 X세대(90년대의 젊은 세대를 대변. 94년 처음 치러진 수능을 경험한 수능세대이자 <슬램덩크>와 홍콩 누아르를 즐긴 다문화 세대)가 있다. 김성우와 박진호 미래에셋자산운용본부장이다. 둘은 모두 75년생으로 서울대 경영학과 94학번 동기다. 차세대 미래에셋을 짊어질 펀드매니저로 각광받고 있다.

신진 세력으로는 ‘동아리 세대’ 펀드매니저들이 있다. 2000년대 초중반 대학가를 중심으로 주식투자 동아리 열풍이 불었다. 펀드매니저가 대학생들 사이에 인기 직종으로 떠오르면서 최근 대학 주식투자 동아리는 면접을 봐서 들어가야 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실제로 2007년 한국밸류자산운용은 신입사원 6명 중 5명을 투자 동아리 출신으로 뽑았다. 이들 동아리 출신들은 아직까지 경력이 짧아 주식운용본부장이나 팀장으로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서 일부는 투자자문사를 직접 차렸다. 가치투자를 표방하는 VIP투자자문은 서울대 가치투자 동아리 출신들이 만든 회사다. 최준철·김민국 대표는 2001년 이 동아리에서 만나 2003년 자문사를 설립했다. 최정용·이재완 에셋디자인투자자문 대표는 고려대 투자 동아리인 ‘가치투자연구회’ 1기 공동회장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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