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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가 현실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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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일본학

이번의 일본 대지진에 이어진 원전 문제는 한국에 많은 교훈을 주었다. 우리 부모 형제는 도쿄나 도쿄 근교에 살아서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일본은 현재 방사능 유출 위험에 처해 있다. 도쿄에서조차 수돗물에서 방사성 물질이 나왔다고 하니 걱정이다.

 1970년대에 미스터리 작가 고마쓰 사쿄(小松左京)의 소설을 영화화한 ‘일본 침몰’을 고등학생이었던 나도 관람한 적이 있다. 몇 년 전에 같은 내용을 리메이크해서 다시 상영했는데 나는 1970년대의 첫 영화가 훨씬 인상 깊었다. 지진과 화산 폭발로 일본이 침몰한 다음에 아시아로 탈출한 일본인들이 굳은 표정으로 시베리아철도 등을 타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영화 마지막 장면은 많은 암시를 주었다. 과연 일본 열도가 사라진 후 일본 민족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것이 그 영화의 테마이기도 했다.

 이번 재해는 ‘설마’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설마’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일본 원전은 일본에서 과거에 일어난 지진을 고려해 내진구조를 세계최고 수준으로 해서 제작했다. 그러나 이번의 지진 규모와 해일의 강도는 일본이 자랑하는 원전구조를 파괴해 버렸다. 지진에 익숙해진 일본인들의 정신상태도 문제였다. 쓰나미나 지진은 천재(天災)이지만 피해를 키운 원전사태는 인재(人災)가 아니라고 부인하지 못한다.

 이번의 엄청난 재앙을 통해 질서의식과 감정을 함부로 표출하지 않는 일본인들의 자세는 세계적으로 칭찬을 받았다. 자연재해가 빈번한 나라여서 어려서부터 훈련을 받아온 결과이기도 하지만 질서유지를 사회의 근간으로 삼은 사무라이들의 오랜 전통과, 전쟁터로 가족을 떠나보내면서도 울고 싶은 감정을 억누르고 웃으면서 보냈던 역사가 현재의 일본인들의 자세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지시를 내려주고 죽은 자에게는 적절한 보상을 해온 일본이었기에 가능한 미덕이었다. 앞으로 신뢰할 만한 권위가 사라지고 보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일본인들의 모습도 달라질 것이다. 말하자면 정부와 지자체, 국민 사이의 신뢰관계에 입각해 형성된 것이 현재 일본인들의 질서의식인 것이다. 그런 지도력이 사라지면 옛 전국시대처럼 몇몇 영웅들이 지지자들을 이끌고 일본을 정치적으로 분할할지도 모른다.

 한국인은 대형 재앙을 마음 한구석에 밀쳐놓고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2차 한국전쟁이다. 끔찍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얼마든지 있다. 북한의 군사적 도발 행위를 단지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판단해도 되는지, 화학 살상무기가 사용되었을 때나 핵 공격이 실제로 일어날 경우, 또는 전쟁 중 원전에 문제가 발생하거나 원전 자체가 표적이 될 때는 어떤 대책이 있는지 등이다. 일본인은 어려서부터 훈련을 받아와서 기본적인 질서유지나 이성을 잃지 않는 행동이 가능하다. 일본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두세 달에 한 번씩 재난 대처훈련을 실시하며 철저하게 질서유지를 몸으로 배운다. 세계적인 불확실성에 대비해 한국에서도 이제 학교에서 실제적인 재난훈련을 실시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일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