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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경춘선에 몸을 싣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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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진홍
논설위원

# 굳이 행선지를 정하지 않은 채 경춘선 전동차에 몸을 싣는다. 급행을 타면 상봉역에서 춘천역까지 몇 개 역만 정차하면서 1시간 조금 더 걸린다. 하지만 급할 일도 없거니와 게다가 어디든 마음 닿는 곳에서 내릴 심산이기에 일부러 모든 역에 서는 완행을 탄다. 그래 봤자 춘천까지 15분 남짓 더 걸릴 뿐이다.

 # 복선화된 경춘전철 안의 풍경은 바깥 풍경 못지않게 재밌다. 65세 이상이면 운임이 공짜인 까닭에 할아버지·할머니들도 부담 없이 전동차에 오른다. 그분들은 대개 춘천까지 직행한다. 어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손을 꼭 잡은 채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어깨 위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고 있다. 언뜻 보기에 해로(偕老)해온 부부는 아닌 듯싶다. 어쩌면 각각 남편과 아내를 먼저 보내고 아이들도 모두 분가시킨 후 뒤늦게 만나 노년의 사랑을 꽃피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경춘전철이 세간에서 오해하듯 노인들만 북적대는 ‘노인철’은 결코 아니다. 대성리역이나 강촌역 등에서 우르르 오르내리는 젊은이들의 풋풋한 기운도 적잖다. 그들은 대부분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한 채 1시간 이상씩 서서 가기 일쑤이지만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힘든 줄도 모르는 것 같다. 여기에 형형색색의 아웃도어 복장을 갖춰 입은 중년의 배낭족들이 또 한 그룹을 이루며 전동차에 오른다. 그들 모두를 싣고 경춘전철은 내달린다. 새봄을 향해!

 # 춘천역을 두 정거장 앞둔 김유정역에서 내리는 이는 손으로 꼽을 만큼 적다. 그 덕분에 거기서 내린 이는 비록 아직 찬 기운이 채 가시진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상큼한 ‘바람’과 겨울을 녹이고 봄을 재촉하는 넉넉한 ‘햇살’을 독차지하다시피 한다. 본래 신남역이었던 김유정역은 ‘봄봄’의 소설가 김유정이 나서 자란 실레마을을 끼고 있다. 마을 뒷산인 금병산에 둘러싸인 모습이 마치 옴폭한 떡시루 같다 해서 이름 붙여진 실레마을(증리)! 거기엔 김유정문학촌이 있고 그 안에 복원된 김유정 생가와 문학기념관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실레이야기길’이라 이름 붙여진 마을 뒷산 길 곳곳에는 김유정의 소설 속 인물들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추려 담은 이정표가 정겹게 서 있어 길 가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를테면, ‘들병이들 넘어오던 눈웃음길’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 ‘덕돌이가 장가가던 신바람길’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던 고갯길’ ‘춘호 처가 맨발로 더덕 캐던 비탈길’ ‘응칠이가 송이 따먹던 송림길’ ‘응오가 자기 논의 벼 훔치던 수아리길’ ‘도련님이 이쁜이와 만나던 수작골길’ ‘근식이가 자기집 솥 훔치던 한숨길’ 등….

 # 실레이야기길을 따라 걷다 금병산 정상을 향해 꽤 가파른 산길을 이어간다. 금병산은 진병산이라고도 하는데 임진왜란과 구한말 등 시대의 곡절이 있을 때마다 이 산에 의병들이 모여 진(陣)을 쳤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흙이 많은 육산이라 여성스럽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산신제를 지낼 때는 항상 감주(甘酒)를 쓴다. 산신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고 본 것이다. 산 정상에 잇닿아 이어지는 능선과 계곡 길도 다양하게 이름 지었는데 한결같이 김유정의 소설과 관련된 것들이다. ‘동백꽃길’ ‘금따는 콩밭길’ ‘만무방길’ ‘산골나그네길’ 등. 특히 만무방길은 고즈넉한 것이 진짜 옛길의 정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 본래 ‘만무방’이란 염치없이 막돼먹은 사람을 가리킨다. 김유정 소설 속의 만무방 응칠이는 아무리 열심히 지어도 빚만 늘자 농사를 때려치우고 이리저리 떠돌며 구걸로 연명하면서 남의 닭 잡아 먹고 제멋대로 사는 망나니다. 하지만 그런 만무방 응칠이도 상하이에서 단체로 놀아난 대한민국 영사들보단 낫다. 세상이 온통 삼류 소설 같은 스캔들 기사로 도배되다시피 한 회색도시를 뒤로한 채 나는 오늘도 경춘선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마음 닿은 대로 내려 걷는다. 그 어디든 생명의 기운이 약동하는 봄길이기에….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