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준법 결벽증’ 일본 …‘입법 편의주의’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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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김현기
도쿄 특파원

“미안해요. 미안해서 어쩌죠.”

 몇 번이고 사과하는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48) 외상에게 재일 한국인 장옥분(72)씨는 “무슨…, 나야말로 미안해”란 말밖에 할 수 없었다.

 7일 밤 9시.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에게 사임 의사를 통보하고 나온 마에하라 외상이 가장 먼저 전화한 곳은 교토에서 불고깃집을 운영하는 장씨였다. 사임의 계기가 된 ‘외국인 헌금’을 한 재일 한국인이다. 장씨는 전화를 끊은 뒤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내가 뭘 모르고 헌금을 하는 바람에…. 아끼고 아껴 해마다 모아 보낸 쌈짓돈 5만 엔이 아들처럼 아끼던 마에하라의 외상 사임이라는 부메랑이 돼 돌아오다니.”

 일본의 정치자금법은 외국인 혹은 외국 기업으로부터 정치헌금을 받는 걸 금지하고 있다. 외국인인 걸 알고도 받으면 5년간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한다. 그런데 지난 38년 동안 불고깃집만 운영해 온 장씨는 정치자금법을 잘 몰랐다. 이름은 늘 일본 이름을 썼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재일 한국인이 겪는 아픈 현실이기도 하다. 헌금도 그래서 일본 이름으로 했다. 당연히 장씨는 그게 위법인 줄 몰랐다. 마에하라 외상 측도 일본 이름으로 돼 있는 소액헌금을 가려낼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일본 정치자금법의 맹점이다. 일 언론들도 이를 순순히 인정한다. 자민당 집권 시절인 2006년 후쿠다 당시 관방장관이 조총련계 기업에서 받은 헌금이 발각된 것도 같은 사례다. 하지만 그때는 고의성이 없다며 받은 헌금을 반납하고 끝났다.

 법을 엄격히 적용하고 법을 위반하면 엄격히 다루는 게 일본이다. 그게 일본의 경쟁력이자 강점이다. 하지만 도가 지나치면 약점이 된다. ‘법 결벽증’이다. 악법도 법이라지만 법이 잘못됐는데도 고칠 생각은 않고 사람만 잘라내니 인재가 자랄 수 없다. 게다가 이번 소동은 여야 간 진흙탕 정치공세의 결과물이다. 외상이 6개월 만에 바뀌고, 총리가 1년에 한 번꼴로 교체되는 ‘일본발 정치 코미디’도 여기서 비롯된다.

 이런 와중에 한국에선 다른 각도에서 정치자금법이 문제가 되고 있다. 만날 치고받고 싸우기만 하는 줄 알았던 여야가 국회의원이 입법과 관련된 로비 후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개정안을 슬그머니 의결했다. 아무런 사전 토론도 없었다. 개정안이 공포되면 로비 후원금 사건으로 이미 기소된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의원 6명이 재판을 안 받을 공산이 크다 한다. ‘브로커 의원’을 자처하겠다는 ‘한국발 정치 코미디’다. ‘준법 결벽증’ 일본 정치나 ‘입법 편의주의’ 한국 정치 모두 낙제점이긴 마찬가지다.

김현기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