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으로 갈등을 아우르려는 작은 한숨 … '도라지꽃 누님'의 작가 구효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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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셋째 누님은 2년 전부터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산전리 산 87-1번지에서 혼자 살고 있다. 다 쓰러져 가는 농가 한 채를 공짜로 얻어 살고 있는 것이다. 더도 덜도 할 것 없이 북한강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황토방 카페처럼 꾸며 놓고 산다. 누님이 두 마리의 개를 얻어다 키운 것도 마른 장미와 마른 옥수수를 창틀에 멋스럽게 걸어놓는 일과 그다지 다를 게 없었다. 흰 개 이름은 백구였고 검정개 이름은 먹구였다."

그러던 어느날 백구가 개밥을 주던 누님의 손을 문다. 인테리어 재료를 구하러, 혹은 친구를 만나러 서울엘 가면 닷새고 엿새고 내려올 줄 모르던 누님 탓에 백구와 먹구는 쫄쫄 굶기 일쑤였던 것이다. 화난 김에 누님을 물었던 백구는 누님이 상처가 덧나 입원한 뒤 죄책감 때문인지 먹기를 사양하다 마침내 죽는다. 그 뒤로 누님은 횡성을 떠나지 않고 완전한 농사꾼이 되어 간다.

누님은 백구를 묻은 텃밭에 잔뜩 도라지를 심는다. 여름이 되면 온통 도라지꽃 천지가 된다. 도라지꽃이 피면 누님은 보랏빛 옷을 입는다. 그래야 흰 꽃은 백구의 영혼이 되는 것이다. 비로소 누님은 백구와 함께 산골을 지키며 살게 되었다….

표제작인 “도라지꽃 누님”의 대강이다. 소설로 쓰기는 했지만 실화이기도 하다. 누님은 이제 나까지 횡성으로 끌어들일 모양이다. 3백만원짜리 지상권 가옥이 났으니 사지 않겠느냐고 전화를 한 것이 어제였다.

소설 쓰기란 갈등구조를 포착해 내는 일에서 시작된다. 좋은 나라와 나쁜 나라가 싸우는 것이 소설의 시초인 것이다. 좋은 나라의 승리로 싸움은 끝나고 갈등은 해결되며 한편의 소설은 끝나게 되어 있다.

시대에 따라 나쁜 나라는 좀더 다양하고 복잡한 얼굴을 하고 등장한다. 때로는 계급의 모양을 하기도 하고 부조리한 사회구조의 얼굴로 나타나기도 하며 타락한 도덕률과 파괴된 환경 혹은 피폐해진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한 것은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모두 나쁜 나라를 대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연 세상은, 소설은, 이쪽과 저쪽 혹은 선과 악의 갈등구조로밖에 읽힐 수 없는 것일까.

소설을 써 가면서,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은 딱 부러지게 이쪽과 저쪽, 선과 악의 영역을 임의로 정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입장과 관점에 따라 모든 것이 타당과 부당의 양면을 갖게 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면 소설 쓰는 자에게는 딜레마일 수밖에 없다. 소설이 사회와 삶을 반영해야 한다는 원론을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이제 도식적이거나 고전적인 이분 갈등구조는 반성과 회의와 해체의 과정을 통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판이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은 결국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 모색되어야 하지 않을까.

“도라지꽃 누님”에 실린 내 소설에는 비난받아 마땅할 인물 따위는 없다. 전적으로 지지받고 옹호되어야 할 가치를 지닌 전형적인 인간 또한 없다. 한편으로 보면 부정적인 측면을 지니면서도 한편으로 보면 그의 사고와 행동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들은 선과 악이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존재 혹은 운명과 피치 못할 갈등을 겪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백구를 굶긴 누님에게나 누님을 문 백구에게나 그 나름대로의 운명적인 이유들이 있어 섣불리 어느 한쪽을 탓할 수 없다. 다만 이해하고 공감하려 함으로써 세상의 갈등을 연민으로 아우르려는 작은 한숨들이 있을 뿐이다. “도라지꽃 누님”에 실린 열한편의 소설과 인물들은 모두 그렇게 생겨난 것이다.

도라지꽃 누님 (세계사, 8,500원)

소설가 구효서는...

57년 강화 출생
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마디’가 당선되며 작품활동 시작
제27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창작집으로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등과 장편 “낯선 여름” 외 다수

[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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