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길로 빠졌더니 결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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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호 10면

“지금 어디쯤 온 거야?” 아내에게서 온 전화다. “글쎄, 국도로 달리고 있거든.” “고속버스 탄 거 아냐?” “그게 설명하자면 좀 긴데 아무튼 우리가 믿고 맡겼어.”
세 시간 전, 그러니까 오후 5시45분에 나는 부산발 서울행 우등 고속버스를 탔다. 평소라면 다섯 시간 정도 걸리겠지만 이런 명절 연휴 때는 시간을 기약할 수 없다. 그런 걱정을 밀쳐내려고 나는 심호흡을 하며 책을 펼쳤다. 눈은 책을 읽고 있지만 내용이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다른 승객들도 저마다 그런 걱정을 나타내는지 버스 안이 웅성거렸다. 그때 버스기사가 등장했다. 그는 믿음직한 체격에 목소리도 의젓했다.
“저는 오늘 이 버스를 운전해 여러분을 안전하게 도착지인 서울까지 모시게 된 기사입니다. 여러분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오늘 고속도로가 꽉 막혀 있습니다. 오늘 안으로 도착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일 저를 믿고 맡겨 주신다면 오늘 안으로 도착하도록 열심히 달려 보겠습니다. 고속도로를 버리고 국도를 타려 합니다. 24년 무사고 운전에 고속버스 운행만 10년 넘게 한 베테랑 기사입니다. 저를 한 번 믿어 주시겠습니까?”

백마 탄 기사처럼 믿음직한 버스기사에게 승객들은 모두 박수를 치고 “믿습니다”고 환호한다. 물론 나도 힘껏 손뼉을 쳤다. 그런 믿음과 환호 속에서 버스는 신나게 출발했고 그래서 국도를 쉬지 않고 세 시간째 달리는 중이었다.

아내의 전화를 받고 나니까 나는 정말 버스가 어디쯤 지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도 믿고 맡긴 기사에게 그런 걸 묻는다는 것은 어쩐지 예의도 아니고 신의를 저버리는 염치없는 행동 같았다. 가방 속에는 두 권의 책이 더 있었지만 독서는 어려웠다. 글자들이 마구 날아다녔다. 차츰 다리가 뻣뻣해 오고 사지가 뒤틀렸다. 무엇보다 오줌이 마려웠다. 방광이 터질 것 같았고 고속도로의 휴게소가 그리웠다. 휴게소를 떠올리자 와락 허기가 졌다. 통감자가, 핫도그가, 어묵이 간절해졌다.

버스는 쉬지 않고 달렸다. 교통도로지도에도 나올 것 같지 않은 도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 나는 기사를 믿고 맡긴 게 후회가 됐다. 유치하게 박수까지 친 자신이 미웠다. 막혀도 좋으니 다시 고속도로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차마 그런 말을 기사에게 할 수는 없었다. 믿고 맡겼으니까.

소변이 급한 승객들의 요구로 버스는 갓길에 섰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추위와 어둠 속에서 몸의 다급함을 몸 바깥으로 내보내며 하얀 김과 함께 진저리를 쳤다. 다시 버스에 올라타 잠이라도 자려 했지만 이상하게 졸리지 않았다. 자꾸 나는 창밖을 보며 이곳이 어디인지 알려고 애썼다. 현재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자는 불안하다. 도무지 잠들 수 없다. 불안한 눈으로 창밖을 아무리 살펴도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자정을 지나고 있는 시간뿐이었다.

버스는 막히지 않고 줄곧 내달렸다. 화장실 때문에 중간에 한 번 더 선 것 말고는 쉬지 않고 달렸다. 결국 버스는 다음 날 오전 3시20분쯤 서울에 도착했다. 기사는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리는 승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활기 넘치는 인사를 건넸다.
터미널을 빠져나오기 전 나는 봤다. 우리보다 두세 시간 늦은 출발시각이 적혀 있는 버스들이 이미 도착해 나란히 서 있는 것을.


김상득씨는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아내를 탐하다』와『대한민국 유부남헌장』『남편생태보고서』를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일하고 있다. 웃음과 눈물이 꼬물꼬물 묻어 있는 글을 쓰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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